북한 선박 ‘금야’호의 수상한 행보…해상 환적 의심
2024.01.31
앵커: 선박이 물 위에 떠 있을 때 선체가 가라앉는 깊이를 ‘흘수’(draft)라고 하는데요. 선박의 적재량을 나타내는 흘수의 변화는 해상에서 선박 간 환적이 이뤄졌음을 나타내는 주요 지표 중 하나입니다.
북한의 ‘금야’호를 비롯해 과거 대북 제재를 위반한 바 있는 북한 선박들에서 최근까지도 흘수의 변화가 감지돼 여전히 해상에서 불법 환적을 계속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자유아시아방송(RFA)이 ‘금야’호의 의심스러운 항로를 추적해 봤습니다.
보도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금야’호, 일주일 사이 흘수 변화 11번..목적지도 수시로 변경
지난해 11월 19일 북한 청진항을 떠난 북한 화물선 ‘금야’호(9004073).
이 선박은 과거 북한산 석탄 수출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의 지목을 받아왔습니다.
선박의 명칭과 위치 정보 등을 알려주는 ‘마린트래픽’(Marine Traffic)에 따르면 ‘금야’호는 세계 표준시 기준으로 지난 11월 24일 오후 동중국해에 진입한 뒤 다음 날 오전 2시경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끄고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그리고 약 20시간이 지난 25일, 기존 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260km 지점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 ‘금야’호는 계속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다 다음 날인 26일, 중국 저우산시 성쓰현 인근 해역에서 멈췄습니다.
마린트래픽에 따르면 ‘금야’호는 이곳에서 12월 3일까지 약 1주일간 머물렀는데, 그 사이 해상에서 흘수 변화가 11번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예로 ‘금야’호가 북한 청진항을 떠날 당시엔 흘수가 3.1m였는데 성쓰현 해역에서는 4.6m로 높아진 겁니다. 즉, 그 사이 배에 무언가를 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금야’호는 11월 28일~29일에 많은 선박이 모여있는 곳에서 벗어나 다소 한적한 남쪽으로 이동하더니 갑자기 빙빙 돌거나 좌우로 방향 전환을 하며 의심스러운 항적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30일에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12월 3일까지 나흘간 같은 지점에 머물렀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박의 흘수 변화가 여러 번 감지됐는데, 12월 2일 20시 50분경(세계표준시 기준)에는 4.6m였던 흘수가 갑자기 11.6m로 상승했다가 30분 뒤에는 다시 6.5m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또 20분 뒤에는 3.4m로 더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선박에 무언가를 적재했다가 하역한 것으로 풀이되는 정황입니다.
‘금야’호의 목적지도 최소 30번이 바뀌었는데, 흘수가 변하면 곧바로 목적지가 변경되는 정황도 똑같은 흐름입니다.
다음 날인 12월 3일에도 ‘금야’호의 수상한 행보는 계속됐습니다. 흘수의 변화에 따른 목적지 조작도 계속됐습니다.
이날 오후 6시 30분경에는 흘수가 4.6m에서 10.4m로 높아져 상당량의 물건을 적재한 것으로 의심됐는데, 두 시간 뒤에는 다시 4.6m로 낮아졌습니다.
또 5일에는 중국 전장(ZhenJiang)항 ‘ZHE15’ 부두에서 물건을 적재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때 흘수가 4.7m에서 7.2m로 바뀐 것이 확인됐으며, 부두를 떠나 상하이항을 거쳐 해주를 향하는 길목에서도 흘수와 목적지가 수시로 변하는 등 불법 환적 의심 정황을 보였습니다.
‘금야’호의 수상한 행보는 2024년 새해 들어서도 계속됐습니다.
이스라엘의 해운정보업체인 ‘윈드워드’ (Windward)에 따르면 ‘금야’호가 지난 17일 자동식별장치를 끄고 자취를 감춘 뒤 25일 중국 인근 해역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흘수가 4.6m에서 7.8m로 늘어났는데, 당시 윈드워드가 자체적으로 제재 위반 의심 경보를 발동하기도 했습니다.
또 윈드워드와 마린트래픽 자료를 따르면 북한 화물선 ‘사향산2’호(8359031)가 지난 16일 중국 대련항 입항을 앞두고 앞서 해상에서 흘수가 3~5m를 여러 차례 오가는 양상을 보였고, 항구를 방문해 미상의 물품을 적재한 뒤 북한으로 돌아갈 때의 흘수는 6.2m였던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또 자유아시아방송이 확인한 결과 ‘세전봉’호(8303290), ‘홍대1’호(8730986), ‘진롱’(8730986) ‘부양6’(9536272)호 등도 유사한 방식으로 해상에서 계속 흘수 변화를 보인 것으로 나타나 북한의 불법 해상 환적 활동은 여전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흘수 지표, 제재 위반 혐의 밝히는 중요한 자료
유엔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단과 미국의 연구기관들은 해상에서 북한 선박의 흘수 변화는 선박 간에 환적이 이뤄졌음을 시사하는 주요 지표로써 이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미국의 ‘제임스 마틴 비확산연구센터’는 앞서 발간한 ‘해상제재’ 보고서(Maritime sanctions: Tips for due diligence, 2021)에서 “일부 선박 간 환적은 화물의 기원이나 목적지를 숨기는 제재 회피의 주요 수단이기도 하다”라며, “제재 회피가 목적인 선박 간 환적 활동은 종종 특정한 장소에서 목격되는데, 대북 제재와 관련된 경우 주로 서해와 동해, 동중국해, 통킹만 등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보고서는 “선박 간 환적이 잦은 것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선박자동식별장치가 며칠 동안 꺼져 있거나, 선박이 짧은 기간 내에 동일한 항구를 여러 번 출입하는 경우, 또는 항구와 환적 지역 사이를 반복적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나타날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특히 “환적 행위는 화물을 적재하거나 하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흘수의 변화를 가져온다”며, 흘수 지표는 제재 위반 혐의를 가려내는 데 필요한 유익한 자료라고 보고서는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랜드연구소도 ‘대북제재 회피 보고서’(North Korean Sanctions Evasion Techniques, 2021)에서 “북한 선박들은 종종 위장한 상태로 활동하며, 환적 작업도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선박들이 적재량이나 하역 상태를 숨기기 위해 흘수 변화를 거짓으로 보고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것도 유의할 사안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7년에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 2375호에서 북한이나 북한을 대리하는 선박이 공해상 환적을 통해 물품을 건네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또 결의안을 위반한 기업이나 개인은 자국의 처벌뿐 아니라 미국과 한국 등 관련국으로부터 2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지난 11일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따른 대응 조치로 8년 만에 북한 선박 11척을 독자 제재 명단에 올렸습니다.
한국 외교부에 따르면 제재 대상으로 지정된 선박은 ‘남대봉’, ‘아봉1’, ‘경성3’, ‘골드스타’, ‘아테나’ 등으로 이 선박들은 해상에서 유류 환적과 석탄 밀수출 등 유엔 대북 제재 위반 행위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