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위축되는 북한 시장] ④ “나에게 시장은 ‘산소’이자 ‘생명수’였어요”

워싱턴-천소람 cheons@rfa.org
2024.12.12
[특집: 위축되는 북한 시장] ④ “나에게 시장은 ‘산소’이자 ‘생명수’였어요” 왼쪽부터 탈북민 김서영(가명), 김일혁, 지철호 씨
/RFA Photo

앵커: 북한에서 장사해 먹고 살았던 탈북민들에게 시장은 많은 시련과 아픔, 그러면서도 살아갈 힘과 희망을 줬던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산소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는 엄마와 같은 곳이기도 하며,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생활의 최전선이기도 했는데요.

 

오늘날 시장에 대한 북한 당국의 통제와 단속이 강화하면서, 탈북민들은 주민들이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된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습니다.

 

[RFA 특집, 위축되는 북한 시장] 마지막 순서로 탈북민들에게 시장은 어떤 공간이었고, 어떤 의미였는지 천소람 기자가 직접 들어봤습니다.

 

[김일혁] 시장이 정말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나에게는 정말 생명수와 같은 거였죠.

 

[김서영(가명)] 시장은 사람들의 생계를 유지해 주는 생활 전선이라고 할까요. 시장에 나가고 싶어서 나가는 건 아니거든요. 살기 위해 나가는 거니까.

 

[지철호] 북한 주민에게 시장은 사회로 놓고 볼 때 어머니와 같은 존재죠. 배고플 때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곳, 내가 가진 것을 통해 경제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곳. 사람으로 놓고 보면 시장은 산소와 같은 곳이고 엄마와 같은 곳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북한 주민의 생계를 책임져 온 시장. 북한을 떠나온 이들에게 시장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묻자 다양한 답변이 돌아옵니다.

 

어떤 이에게는 시장이 ‘산소생명수처럼 삶의 필수적인 존재였고, 또 다른 이에게는 생활 전선이었으며, 굶주릴 때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엄마의 품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탈북민 김서영(가명), 김일혁, 지철호 씨를 통해 시장에 얽힌 이들의 사연과 의미를 직접 들어봤습니다.  

 

<관련 기사>

[특집: 위축되는 북한 시장] ① “장사 안돼 매대 접어요”

[특집: 위축되는 북한 시장] ② ‘상유정책 하유대책’…시장은 계속된다

[특집: 위축되는 북한 시장] ③ 시끌벅적한 시장, 다시 볼 수 있을까?

 

탈북민 김서영 씨의 이야기

“10년 넘게 시장에서 장사한 어머니가 코로나 이후 그만두셨어요.”

 

K121224-김서영.jpeg
2021년 8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김서영 씨(가명)의 뒷모습. / RFA photo

 

2017, 고향인 양강도 혜산을 떠나 2019년 한국에 정착한 탈북민 김서영 씨(신변 안전을 위해 가명 요청).

 

그의 어머니는 10년 넘게 비공식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담배, 라이터, 의류 등 계절과 시기에 따라 수요가 있는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김 씨가 기억하는 시장은 북한 주민에게 ‘생활 전선이었습니다.

 

생활필수품, 식자재, 의류 등을 사고팔며 시장에서 번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김서영(가명)] 북한 사람의 경우 돈을 버는 것도 장마당에서 해야 하고, 그 돈을 벌어서 사람이 먹고살고, 사고팔고 하는 모든 게 장마당에서 이뤄지니까 북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장소죠. 의미가 깊고요.

 

김 씨의 어머니는 30대 중반부터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어머니가 번 돈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김서영(가명)] 장마당 활동을 10년 넘게 한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 때인 16살부터 했으니까 13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도 장마당에서 잠깐 달리기 장사(공식 시장 밖에서 임시로 물건을 팔다 단속이 나오면 도망가는 장사) 했다가, 다른 장사도 하고…. (수입이) 거의 장마당에서 버는 돈이죠. 80~90%가 장마당에서 벌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코로나 대유행 이후 김 씨의 어머니는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공식 시장은 물론 비공식 시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는데, 과거에는 벌금을 내거나 뇌물을 주면서 암암리에 장사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코로나 대유행 당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김서영(가명)] 제가 2년 전에 가족들과 연락할 때 그러더라고요. 우리 엄마의 경우 거의 장마당에서 장사해서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단 말이에요. 장사를 못 하게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곧 하겠지했는데, 그게 아니래요. 예전과 다르고, 이제는 장사를 못 나간 지 한참 됐고, ‘이젠 그걸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엄마도 장마당에서 단속도 많이 당해봤고, 조사도 해봤는데 그럼에도 장사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한 걸 보니까 진짜 심각하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김 씨는 특히 북한 당국이 공식 시장 밖에서 장사하는 행위에 대해 강력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상인들이 많이 없어졌다며, 시장 경제가 위축된 지금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사는지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 단속이 정말 심하게 이뤄지고 있군요. 장사를 하지 못하면 가족들은,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까요?

 

[김서영(가명)] 장사를 막으면 어떻게 사냐고 물었어요. 진짜 이해가 안 되거든요. 뇌물 주면서도 했었는데, 그걸 막았다고 하니까.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답이 없는 거죠. 진짜 막막해요. 저는 거기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 알잖아요. 돈을 벌 수 있는 경로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시장에 대한 통제와 단속 강화로 현금 수입이 줄어들면서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계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덩달아 김 씨의 어깨도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김서영(가명)] 가족들이 북한에서 너무 힘들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하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죠. 북한이 어려워질 때마다 저에게는 점점 부담이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보탬을 주는 정도라고 하면, 지금은 아예 장사하는 길이 막혀서 전체 생활비를 해줘야 하는 상황이잖아요. 내부의 상황을 아니까 안 해줄 수도 없고….

 

탈북민 김일혁 씨의 이야기

코로나가 제게는 기회였지만, 굶어 죽는 사람이 비일비재했습니다.”

 

K121224-김일혁.png
2024년 3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55차 유엔 인권이사회 부대 행사에 참석한 탈북민 김일혁 씨. /RFA Photo

 

지난해 5, 황해남도 강령군에서 목선을 타고 서해를 통해 탈북한 김일혁 씨.

 

김 씨는 2019년까지 시장에서 노트북, TV 등 가전제품과 오토바이, 자전거 등을 주로 팔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종잣돈으로 미화 3~5천 달러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기간에 식량 장사를 했는데, 김 씨에게 코로나 대유행은 오히려 기회가 됐습니다.

 

북한 당국이 개인의 식량 판매를 금지하자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식량 자체가 귀해지면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김 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식량을 팔았고, 가전제품에 투자했던 돈의 101밖에 쓰지 않았지만, 수익은 상상을 뛰어넘었습니다.

 

[김일혁] (미화로) 500달러 정도의 종잣돈이 들어갔는데 약 200달러 정도의 이윤이 남았습니다. ‘대박이다. 장사가 잘된다라는 기분이 들고 매일 신났어요. 예를 들어 보통 옥수수 1kg 2천 원에 사서 이윤 200 (남기고), 2200원에 파는데요. 코로나 기간에는 2천 원에 산 옥수수를 3천 원 내지 3500원에 팔았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후 약 3년 동안 김 씨가 식량 판매로 벌어들인 돈은 이전 10년 동안 장사해 번 돈과 맞먹었습니다.

 

또 코로나가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건 ‘한국 라디오의 역할도 컸습니다

 

[김일혁] 한국 라디오를 들으면서 코로나가 발생한 상황을 먼저 안 거죠. 십중팔구 국내 식량값이 폭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장마당의 식량을 대대적으로 사들여서 식량을 쌓아놨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생각했던 그대로 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옥수수 1kg(북한 돈으로) 1500원 했거든요. 나중에는, 이 옥수수를 1kg 6천 원에 팔았어요. 그러고 가을이 됐을 때 또 식량을 많이 사놨습니다. 이런 식으로 식량 장사를 해서 많이 벌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김 씨가 탈북한 2023 5월까지만 해도 그의 동네에서 굶어 죽는 주민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김일혁] 제가 나올 때까지도 동네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누구 아버지가 굶어 죽고, 또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누구 엄마가 굶어 죽고, 이런 일이 주위에서 비일비재했는데요. 장마당에 돈을 들고 나가도 사 먹을 식량이 없는 상황이었고, 국가에서 식량 판매를 못 하게 통제하니까 생긴 일인데….

 

국가가 홍보하던 양곡판매소는 모순이 가득했습니다. 항상 문을 열고 식량을 판매하는 게 아니었고, 모든 주민이 양곡판매소의 시간에 맞춰 식량을 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고 김 씨는 회상했습니다.

 

[김일혁] 배고픈 사람이 식량이 떨어졌는데 필요할 때 가면 없어요. 필요할 때는 못 사고 국가에서 이걸 나눠줘라, 공급해라하면서 명령이 내려오면 그때 이 양곡판매소들이 문을 쫙 열어놓고 대량으로 판매하는 거예요.

 

김 씨에게는 운 좋게도 큰돈을 벌 수 있게 해준 시장 활동.

 

하지만 대부분 북한 주민은 코로나 대유행 당시 이동 제한과 시장 단속, 식량값 상승, 현금 수입의 감소 등 현실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김일혁] 국가에서 하라는 대로 안 하고, 장마당에 나와서 장사라도 조금 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먹고 버티며 살고 있는데, 고지식하게 착한 사람들은 정말 하룻밤 자고 나면 집안에서 약한 사람부터 하나씩 굶어 죽기 시작하는 거죠. 아버지가 굶어 죽고, 엄마가 굶어 죽고, 그다음 애들이 굶어 죽고. 이게 현실이에요.

 

탈북민 지철호 씨의 이야기

장마당 활동으로 가족이 겨우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K121224-지철호.jpeg
2023년 9월, 한국의 인권단체 ‘나우(NAUH)’의 사무실에서 지철호 정착지원실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 RFA Photo

 

2006년 탈북해, 지금은 한국의 북한인권단체 나우(NAUH)’에서 탈북민 구출과 정착 지원을 돕고 있는 지철호 정착지원실장.

 

탄광 지대인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가 고향인 지철호 실장은 북한에서 석탄과 석회석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공식 시장에서 자릿세를 내고 장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어서, 지 실장은 시장 입구에서 물건을 팔거나 방문 판매, 메뚜기 장사도 했습니다.  

 

[지철호] 처음에는 석탄 장사를 했습니다. 방문 판매 같은 형식이죠. 리어카에 석탄을 싣고, 집마다 문을 두드리면서 팔았습니다. 메뚜기처럼 판매했던 기억이 있고요. 나중에는 석회석을 장마당에서도 팔고, 방문 판매도 하고, 회령역도 내려가서 팔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단속 때문에 쫓겨나기도 하고, 물건을 뺏기기도 했는데, 한 번은 석탄을 주고 잠시 빌린 리어카(손수레)까지 압수당한 적도 있습니다.   

 

[지철호] 리어카는 북한에서 개인 집의 큰 재산이기도 하거든요. 그걸 찾지 못해서 발을 동동거리고, 외상으로 술과 두부를 사서 단속한 사람들에게 주면서 (리어카를) 돌려달라고 사정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시장에서 번 돈으로 지 실장을 포함한 다섯 식구가 먹고살았습니다.

 

물론 턱없이 부족했지만, 고난의 행군으로 배급 체계가 무너지고, 임금도 받지 못해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시장은 지 실장의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산소와 같은 존재였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지철호] 장마당 활동이 가정 경제에는 산소와 같은 역할입니다. 들어오는 외부 수입 없이 100%가 장마당 수익이었습니다. 하지만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수익이었습니다. 만약 옥수수 100g이라고 했을 때, 그 옥수수를 가족 구성원 5명이 나눈다면 20g씩 돌아가는 거잖아요. 그걸 먹고 죽지 않고 버텼어요.

 

[기자] 코로나 이후 강력하게 시장을 통제하고 있는데, 그동안 시장 활동으로 돈을 벌던 주민들은 지금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있을까요?

 

[지철호] 코로나 이후 더 통제가 심해졌잖아요.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기보다, 생계유지를 못 해서 걱정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장사라는 게 그래도 밑천이 있어야 되잖아요. 밑천이 없으면 빌려야 되겠죠. 예를 들어 힘들 때 1kg을 빌리면 가을에 2~3kg으로 갚아야 하는데요. 이런 고리대금이 더 성행할수록 국가는 이들을 통제해서 더 처벌할 수도 있고요. 고리대금이나 사채 등이 더 성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탈북민들은 시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곳이었기에, 오늘날 당국의 단속과 통제 강화가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집니다. 시장이 위축된다면 북한 주민의 생활이 더 어려워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세 끼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도록 장사만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날 북한 시장의 현주소를 바라보는 탈북민들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천소람입니다.

 

에디터 노정민, 웹편집 이경하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