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께 잘살아 보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RFA 주간 프로그램 ‘경제와 우리생활’ 진행을 맡은 정영 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북한에서 개인들의 소공업이 가장 발달된 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남한의 통일연구원 정은이 연구위원님과 전화로 연결됐습니다.
기자: 정은이 연구위원님 안녕하셨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안녕하세요.
기자: 오늘은 손재간이 좋기로 소문난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재미나는 일화를 하나 전해주시겠다고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정 연구위원: 네 미국 조지아의 작은 도시 '돌턴'이 유명해진 일화입니다. 돌턴이 제 2차 세계대전 후 카펫 생산의 센터로 부상한 이유는 아주 우연에 의한 것이지요. 즉, 돌턴에 사는 캐서린 에반스라는 10대 소녀가 결혼 선물로 침대보를 만들었는데요. 당시 이 침대보는 술이 달렸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기술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선물 받은 친구들과 이웃들은 아주 기뻐했고, 곧 이 마을 사람들이 수공업적인 방식으로 만들어 팔면서 인근 이웃을 넘어 팔리기 시작하면서 돌턴과 인근 도시가 오늘날 카펫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지요. 북한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기자: 카펫이라고 하면 북한 주민들도 아마 중국에서 나오는 카펫을 보시고 아실거예요. 미국의 돌턴이라는 지방에서 소녀가 카펫을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주고 또 팔다보니까 지금은 카펫 생산지가 되었다는 말씀인데요. 미국의 가정들이 카펫을 좋아합니다. 북한에서도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생산된 제품들이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특히 어떤 도시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정 연구위원: 대표적으로 평양과 가까운 '평성'이라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요. 복장뿐만 아니라 평성은 구두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기자: 구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평성이 어떻게 해서 구두 생산지로 유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원래 거기에 구두 산업 기반이 있었습니까?
정 연구위원: 북한 이탈주민들을 조사해보면 원래 그런 것은 아니였다고 합니다. 오히려 평양이나 순천에 구두공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더 잘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평성에도 '합성 가죽 공장'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구두를 제조하는 가죽과 같은 원료나 기술 조달을 위한 기반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성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구두 생산지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아주 우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평성에서도 특히 주례동이 가내수공업 방식에 의한 신발 생산지로 유명한데요. 현재는 주례동 주민의 약 80%가 신발업에 종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례동이 '신발촌'으로 유명하게 되었다고 북한이탈주민들은 말했습니다.
기자: 어떻게 해서 평성의 주례동이 신발촌으로 유명하게 됐나요?
정 연구위원: 원래 평성에서 최초로 신발을 만들어 판 사람은 평성 출신자가 아니라 평안남도 순천 신발공장의 기술원 출신입니다. 이 사람이 직장을 순천에서 평성으로 옮겨오면서 주례동에 정착하게 되었는데요. 사실 주례동은 골짜기가 깊고 산턱이 높아서 아주 못사는 동네에 속했습니다. 그는 평성으로 직장을 옮겨오면서 돈이 없으니 집을 시내 중심에서 얻지 못하고 평성시에서도 외진 곳, 즉, 주례동에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배운 기술이 신발밖에 없어서 신발을 한 켤레 두켤레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팔다 보니 반응이 좋아서 사업 규모를 넓히게 되고, 돈을 많이 벌다보니 주변 사람들도 따라 하면서 경쟁자도 많이 생겨나고 그러면서 이 동네 전체가 신발 관련 마을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기자: 네 앞서 말씀한 미국의 돌턴과 비슷한 그런 사례 같은데요. 주례동이 이렇게 신발제조 동네로 변하면서 이 지역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정 연구위원: 동네가 점차 분업화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초기에는 평성과 제일 가까운 순천구두공장에서 원료를 조달해 썼는데, 가격이나 디자인 등은 뛰어나지만, 질이 좋지 못해 내구성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한 해 밖에 신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통업에 눈을 뜬 사람들이 라선에서 중국산 원료를 날라다 신발 제조업자에게 팔았습니다. 따라서 원료 조달자들 사이에서도 신발 원단이면 원단, 악세사리면 악세사리, 신발 바닥이면 바닥 등 전문화가 되어서 날라다 팔았습니다. 그러면서 평성에는 신발 제조 관련 원료들을 파는 종합상점, 물류창고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제조와 원료 조달의 측면에서 분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주례동이 신발 제조업지로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기자: 주례동에서 만든 신발이 북한 국내 시장에서 경쟁력이 좀 있었습니까?
정 연구위원: 중국산 원료를 바탕으로 국내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서 신발을 제조하니 가격은 절반인데, 내구력도 있고 디자인이 좋아서 중국 신발이 팔리지 않을 만큼 경쟁력이 생겨났다고 북한에서 소문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스게 소리로 북한으로 신발을 파는 중국인 수입업자들이 평성에서 신발을 제조한 사람들을 꼭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평성에서 실제 만든 신발을 사다가 중국 상표를 붙여서 중국에 팔기도 하였습니다. 즉, 신발수출임가공업의 탄생이지요.
기자: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중국에서 신발을 들여다 신었는데, 나중에는 역수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네요. 그렇다면 평성에 있는 합성가죽공장은 신발공장과 관계가 있었나요?
정 연구위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조합성가죽공장이 망하지 않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공장은 중국에서 들어오는 가죽 원단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자극을 받아서 나름 꾸준한 기술 개발을 하게 됩니다. 특히 이 공장은 원래부터 애국공장이었습니다. 즉, 일본 상공인 투자에 의해 지어진 공장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설비는 수준이 높습니다. 주례동 신발이 초창기에 잘 팔리는 이유도 인조가죽공장에서 나오는 원료가 어느 정도 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장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색상이나 디자인, 탄력성, 다양성 등에서 떨어졌는데, 중국산 원단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나름 기술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주례동의 신발 제조업자들이 이 공장에 영향을 주게 되면서 공장도 시장을 읽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자: 그러면 주례동 이외에 그렇게 발전한 동네가 또 있나요?
정 연구위원: 주례동이 신발이 유명하다면, 보덕동은 집집마다 껌을 만들어서 판매합니다. 원료는 가까운 순천 비날론 공장에서 껌 원료가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사다가 설탕과 섞어서 만들고요. 복장은 평성 백화점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집적되어 있습니다. 평성 백화점 같은 경우에는 과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삼화동은 패딩 제조업으로 유명하고, 하차동은 비닐 사출제품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기자: 북한에서는 견본만 있다면 비슷하거나 똑 같이 만든다는 재간둥이들이 많은 데요. 앞으로 이러한 수공업적인 방법으로 시장을 개척한 고장들을 계속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상 관계로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정 연구위원: 감사합니다.
참여자 정은이 연구위원, 기사작성 정영기자,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