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 (1)

워싱턴-정영 jungy@rfa.org
2021.12.03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 (1) 북한이 지린·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의 '북한의 날' 행사에서 배포한 투자소개서에 실린 나선경제무역구의 전경.
/연합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께 잘살아 보는 방법을 고민해보는 RFA 주간 프로그램 ‘경제와 우리생활’ 시간 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세계 경제 지식을 알아보고 그것을 북한 현실에 효과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 봅니다. 도움 말씀에는 경제 전문가로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객원 연구원 김중호 박사, 진행에는 정영 입니다.

기자: 김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김중호 박사: 네 안녕하십니까?

정: 오늘은 경제와 우리생활 21번째 순서로 북한경제특구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들을 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가 북한경제특구를 다루는 과정에 나선경제특구에 대해 가볍게 다루었는데요. 오늘은 나선경제특구의 특징과 실패 원인을 짚어보겠습니다. 북한 경제에 관해 논의할 때 나선경제특구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김: 나선경제특구의 역사를 알면 북한경제의 변화 방향과 제도적 문제점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나선특구의 탄생 배경을 보죠. 북한 정부는 1991 12 28일 정무원결정 74호로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선포했는데요, 그 시점은 바로 냉전체제가 붕괴되어 공산권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이 중단된 상황이었죠. 다시 말해, 냉전시기동안 구소련과 공산권 국가들로부터 받아왔던 경제지원이 갑자기 사라지게 되면서 경제위기에 봉착하게 되니까 그걸 헤쳐나갈 방안으로서 경제특구 지정을 급하게 추진했던 겁니다.

1995년 김일성종합대학의 김수용 교수가 했던 도쿄 강연을 들어보면 북한의 대외경제정책 변화의 맥락을 알 수 있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했죠.

“1990년대에 냉전구조의 완화로 이념을 넘어선 경제교류가 세계적인 추세로 되고 또한 북한의 대외경제교류의 70%를 차지해온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북한의 자립적 경제 건설노선의 정책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고 상황을 평가하면서 국제경제발전의 필요성과 교류협력이라는 세계경제의 추이에 따른 주객관적인 조건으로 1991 12월에 라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가 창설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 , 당시 우리는 북한에서 나진선봉자유경제무역지대 추진 배경을 잘 몰랐는데요. 박사님 말씀대로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북한의 경제정책 방향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 네 맞습니다. 그 당시에는 북한이 공산국가들의 지원에 의존하지 못하게 되니까 외자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국제경제체제에 뛰어들었구나 그리고 머지않아 체제 전환도 하겠구나 하는 해석과 전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정: 네 그때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외부에서는 북한의 체제가 과연 얼마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시각도 있었는데 북한이 대안으로 만든 나진선봉무역지대 설정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북한정부는 나선무역지대를 1993년부터 2010년까지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화물중계지와 수출, 가공, 관광, 금융 기지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나진항, 선봉항, 청진항을 자유무역항으로 지정하고, 이 지역에 대한 외국투자기업에 기업소득세 및 관세 감면 등과 같은 우대정책을 취한다는 내용을 포함했죠

이와 함께, 북한 정부는 1993년 경제특구와 관련한 국토종합건설계획을 수립하고 외국인투자법, 합작법, 외국인기업법, 외국인투자은행법, 외국인세금법 등 일련의 투자관련 법률도 정비하면서 개발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모양새를 보였습니다.

정: 당초 북한의 나선무역지대가 중국의 경제특구 모델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해도 될까요?

김: 당연히 북한 당국자들이 일단 국제정치경제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들을 모색하는 과정에 중국 경제발전 모델을 많이 공부하고 고민했겠지요.  

중국 모델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적용가능성을 검토했을 겁니다. 중국이 전면적인 개혁과 개방을 동시에 추진했다면 북한은 전면적인 개혁은 전혀 추진하지 않은 채 부분적인 개방을 시도했다는 것이 북한과 중국의 차이 같습니다.

북한이 나선경제특구를 만들 때는 당연히 경제특구의 기본적인 방식과 조건들을 중국 모델에서 많이 배워온 것 같습니다. 당시 유엔개발계획 즉 UNDP가 두만강지역개발계획(TRADP)을 만들어서 북한 중국 러시아 몽골 한국과 함께 개발 협력을 하자고 제안했었거든요.

그런데 북한도 국제개발협력 틀에 참여하는 것처럼 보였다가, 어느 날 나선특구라는 북한 중심의 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국제협력이 추진되지 못했죠. 북한 중심의 경제특구, 즉 폐쇄적 성격의 제한된 특구로 등장을 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중국식 특구와 다른 점이죠.

정: 네 저도 당시 탈북해서 중국에서 약 3년 동안 살았는데요. 그때는 중국의 천진, 료녕성 흑룡강성 등지에는 한국사람, 미국사람, 유럽사람 등이 자유롭게 여행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에는 나진선봉 이외에는 외국 사람들이 여행할 수 없고요. 그리고 나가더라도 북한 안전요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다녀야 하는 제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북한이 처음으로 시도하는 경제특구였기 때문에 대대적인 개방은 힘들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러면 무역지대로 설정되고 나서 계획대로 진행되었습니까?

김: 북한이 무역지대 계획을 발표한 이후 국제사회는 북한의 외국인투자 유치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만, 그와 반대로 북한정부가 1993 3월에 NPT(핵확산방지조약)를 탈퇴한다고 선언하면서 한반도 핵위기가 발생하게 되자 대북투자 분위기가 갑자기 식어버리게 됐죠.

정: 네 그렇지요. 1994년에 미국이 북한 영변핵단지를 폭격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면서 북한 내부에서도 상당히 긴장되었는데요. 그런데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한 이후 북미 간제네바 합의가 성사되었고요. 그 다음에 특구가 다시 재개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그 이후 제대로 진척되었습니까?

김: 1994년에 핵 위기가 좀 가라 앉으면서 1995년 초에 북한이 나진선봉 특구사업을 3단계에서 2단계로 조정하고 사업을 본격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설립하여 정책 입안 및 대외경제협력을 담당하게 하는 동시에 외국 기업 및 외국 자본 유치에 힘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한편, 외자 유치를 위해 외국인투자법, 자유경제무역지대법 등 57개 항목의 외자유치법령을 제정하고 소득세율 14%, 무사증 출입 등의 특혜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였지요.

정: 그 다음에 북한이 나진-선봉시를 직할시로 승격시켰고, 1997년에는 환율 현실화 조치를 취하면서 대대적인 외자유치와 외국인들이 나선특구 안에서 활동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 , 나선무역지대는 시장의 기능을 인정하는 경제관리 방식을 도입한 최초의 경제특구였는데요, 물론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정책 결정자들이 많이 고민을 했겠지만, 여기에서 실험적으로 시도하려고 했던 것들이 2002년 경제관리개선조치의 기본 내용으로 다 묶여서 발표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정: 네 오늘은 시간관계상 여기서 마무리 하고 다음 시간에 나선경제특구가 주는 교훈에 대해 계속하여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김박사: 네 감사합니다.

기사 정영,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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