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께 잘 살아보는 방법을 고민해 보는 RFA 주간프로그램 경제와 우리 생활을 맡은 정영입니다. 오늘은 중국에서 바라본 김형직 군에 대해서 서울에 있는 남한의 통일연구원 정은이 연구위원과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기자: 정은이 연구위원님 안녕하십니까
정 연구위원: 네 안녕하세요.
기자: 그동안 북중 접경지역을 답사하면서 여러 북한도시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셨는데 그 중에 오늘은 김형직 군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먼저 김형직 군의 유래부터 좀 알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정 연구위원: 네 원래는 신의주와 같이 평안북도에 속해 있었고, 후창군으로 불리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8월 (김일성 주석 부친이름을 따서) 김형직 군으로 되었죠. 따라서 김일성의 우상화 정책에 따라 후창군이 김형직 군으로 바뀌었고요. 신파군은 김정숙 군으로 또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출신의 북한이탈 주민들은 후창군으로도 부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자: 김형직 군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정 연구위원: 예 원래 김형직 군은 농촌이었고 또 잘 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로 참 많이 변했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양강도 지역의 다른 군과 달리 또 상당히 부유하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잘 살지 못했는데 고난행군을 겪으면서 시장화가 진행이 되고 또 북중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오히려 이 가난했던 김형직군이 지금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또 그런 변화를 겪은 것 같습니다. 북중 접경 지역에서 김형직군도 보게 되면 해마다 도시의 색깔들이 달라지고 또 상당히 부유해진 그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기자: 제가 어릴 때 10대였죠. 배움의 천리길(김일성 주석이 12살 때 중국 팔도구에서 할아버지가 사는 평양 인근의 만경대까지 천리길을 걸었다고 주장) 행군을 했는데 그때 김형직군에 가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후창군 사람들은 농마국수라고 하는 감자국수를 먹었고, 지붕에는 나무 조각으로 된 기와를 얹은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혁명 전적지 답사지인데도 굉장히 가난해보인다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맞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까요. 우선 소토지라고 부대기 밭 또는 뙈기 밭 많고요. 또 양강도에서도 소토지가 잘 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네, 김형직 군은 혁명전적지 답사지이기 때문에 소토지가 좀 불가능할 것 같은데, 소토지 농사가 잘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제가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이 김형직군은 아주 추운 지역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지역 출신 이탈주민에 대해 인터뷰를 해보니까 양강도 지역에 속하지만 양강도 지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기온이 상대적으로 온화하다고 합니다.
기자: 맞습니다. 후창군이 양강도 오가산 근처에 있는데, 오가산이 해발 1천m가 넘거든요. 그런데 후창군은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분지처럼 된 것 같아요.
정 연구위원: 그래서 다른 양강도 지역에 비해서 곡물도 잘 되고요. 두 번째는 또 지리적으로 북중 접경 지역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북쪽이 바로 압록강을 경계로 한 중국과 접해 있습니다. 아주 가깝죠. 그런데 중국과 접해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소토지에 생산된 곡물조차도 국내 시장보다는 중국을 타깃으로 해서 더 고가에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자: 그러면 김형직군에서 생산된 곡물이 중국에서 팔린다는 겁니까?
정 연구위원: 네, 북한에서 곡물이 중국으로 넘어가는데요. 이탈주민들을 조사를 해보니까 팥 같은 경우 1kg에 중국 돈 12안, 아무리 싸도 4위안입니다. 그런데 팥 1kg은 옥수수 4, 5kg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죠. 매주 콩도 1kg당 쌀 1kg과 맞먹습니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소토지에 옥수수를 심지 않고 값이 나가는 이른바 중국에서 요구하는 메주 콩과 팥을 심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아주 못 사는 사람도 옥수수밥 정도는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약초 등도 캐서 중국에서 요구하는 품목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캐서 중국에 또 팔기도 합니다.
기자: 네, 중국에서는 또 어떤 품목들을 요구합니까?
정 연구위원: 제가 북중 접경지역을 답사를 하면서 작은 목장들 염소라든지 소를 키우는 목장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중국에서는 북한산 염소가 또 인기라고 합니다. 자연 방목을 하다 보니까 "북한 염소는 먹는 풀조차도 약초를 먹는다"라고 생각을 해서 중국에서 아주 비싸게 팔리는데요. 일반 중국인조차 못 먹을 정도로 비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격을 한번 조사를 해보니까 한 마리당 인민폐 800~1000위안 정도라고 합니다. 제가 북중 답사를 많이 해왔는데 신기하게 중국에서 김형직군을 바라보면 한 20여 마리의 염소나 말을 방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이제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그 외에도 돼지도 한 마리당 보통 중국 돈 한 600~700위안입니다.
그리고 닭이나 계란도 모두 유기농이라고 해서 중국에서 높은 가격에 팔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김형직 군 같은 경우는 개인이 머리만 잘 쓰면 산에 가서 힘들게 땀 흘려 농사 짓지 않아도 가축 몇 마리만 잘 키워도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합니다.
기자: 큰 돼지가 600~700 위안 정도다 그렇게 볼 수 있나요?
정 연구위원: 네 맞습니다.
기자: 그러면 현재 북한의 시장 환율로 북한 돈으로 한 60만 원에서 70만 원 정도 되네요
정 연구위원: 네 맞습니다.
기자: 그러면 그 돈으로 쌀을 사면 지금 킬로그램당 5천 원이니까 돼지 한 마리 팔면 쌀 한 120kg 그정도 이제 살 수 있겠네요. 김형직 군도 농촌이기 때문에 포전담당제를 실시할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맞습니다. 농장원(농민) 한 사람당 땅을 분배해주고 1년 국가 계획을 바치고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개인의 몫이 됩니다. 사실 김형직군은 소토제를 통해 집마다 많은 식량을 집에 쌓아 놓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소토지를 통해 수확하는 식량이 적지 않은데요.
그래서 국가에서 나오는 것이 없어도 개의치 않는다고도 합니다. 개인별로 토지를 분배받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차려지기 때문에 또 환영한다고 합니다. 북한도 이제는 시간이 돈이니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시간들을 굉장히 중시하더라고요.
기자: 네, 포전담당제 실시 이후에 농민들에게 자유가 주어진다 그런 말은 어떤 의미로 볼 수 있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협동조합 때에는 매일 농장원들은 협동 농장에 출근해서 작업 지령에 따라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포전담당제 실시 이후에는 단속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가을에 농장에서 바치라고 하는 곡물만 제대로 내면 놀아도 되고, 할 수만 있다면 개인 돈벌이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김형직 군 농장원들은 협동 농장 이외에도 또 돈벌이가 많아서 시간이 무한정 필요한 것이죠. 소토지를 다루자고 해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또 가축을 키우자고 해도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기자: 그렇죠. 그런데 김형직 군의 코로나 영향은 어떻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장마당은 인구 집중률이 높아서 일시적으로 막은 적은 있습니다. 아무래도 인구 밀집도가 높다 보면 그만큼 감염위험이 높아지니까요. 반면에 인구 밀집도가 낮은 상점 같은 경우는 또 영업을 허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실제 코로나로 인해 상업망을 원천 봉쇄했다거나 실제적으로 막은 것은 또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북중 국경 봉쇄로 중국과의 교역은 막혔지만 소토지 등 북한 내에서 할 수 있는 경제 활동, 생산 활동들이 이뤄지고 있는 만큼 다른 지역에 비해 김형직 군은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보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기자: 끝으로 김형직 군 사람들이 잘 살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외부에서 본 시각으로 한 말씀 해 주시겠습니까?
정 연구위원: 네, 아무래도 접경 지역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무역을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북한 주민들에게도 실질적으로 이득이 간다라는 논리가 또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접경지역의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방안이 또 김형직 군 주민들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자: 네, 오늘은 여기서 줄이고요. 다음 시간에 또 찾아 뵙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정 연구위원: 네 고맙습니다.
기자: '경제와 우리 생활' 지금까지 도움 말씀에는 남한의 통일연구원 정은이 연구위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워싱턴에서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