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일 탈북자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청한 것은 이미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이 자리에서 북한의 인권실상에 대해 대통령이 청취한 것으로 보도가 됐는데요. 백악관에 초청받은 탈북자 중 제일 연장자는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 9년을 살았던 김영순 여사입니다. 오늘은 김정일의 사생활을 구체적으로 안다는 이유로 요덕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지난 2001년 탈북해 남한에 간 김 씨를 통해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알아봅니다.
기자: 몸은 건강하시고요?
김영순: 몸은 건강하죠. 갖은 것은 없어도 한국 품에 안겨 긍정적인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하고 살기 때문에… 인간 최고의 가치인 자유가 좋아서…
김영순 여사는 1937년 생으로 만으로 하면 올해 81세입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했기에 기자는 건강이 걱정돼 제일 먼저 안부를 물었는데 목소리 만으로는 그의 실제 나이를 믿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김영순: 저는 내 인생 멋지게 살다 죽자 이겁니다. 20cm 하이힐처럼 송곳처럼 살다 죽자 이겁니다. 오늘 죽어도 내일 죽어도 내인생 한국 품에서 자유가 좋아 자유품에 안겼기에 전 세계를 24번 갔다왔고 이번 미국까지 하면 25회를 갔다 오고 비행기값 숙식비 아무것도 안내고 다닌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죠.
김 씨가 이번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안관을 방문한 것은 그가 정치범 수용소 생존자로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말해줄 수 있다는 점이 작용했는데요.
김영순: 북한에서 1970년대부터 반동이 돼서 김씨 왕조에 의해 요덕 수용소에 가서 7식구 죽고
남편은 신광수의 밀고에 의해 못나오는 수용소에 간지 금년이면 48년입니다. 70년 7월 4일 아파트에서 나와 못본 것이 지금까지 어찌 됐는지 모르잖아요.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르고 이런 속에 살았기 때문에 김씨 왕조의 희생물로 살았기 때문에 정말 한국에 와서는 전부 보상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자: 대통령 만나러 미국 오세요 했을 때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였습니까?
김영순: 미국이 21세기 전 지구촌 어디나 인간의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초점을 맞추는데 리더는 미국이잖아요? 그런 차원에서 미국이 반드시 북한 독재정권을 요절 내주십사 하는 것을 제일 말하고 싶었는데 밖에서만 얘기를 하고 들어가서는 들어가서 3분씩 얘기하라고 해서, 70년대부터 반동이 돼서 김정일 사생활을 알고 있다는 것이 죄가 돼서 요덕 수용소에 가서 어머니, 아버지, 아들 다 죽고 하나 살아나온 중증 장애인이 된 아들하고 한국에 살고 있다고 말했어요. 트럼프 대통령이 놀라운 이야기라고 했어요.
기자: 그 사연을 듣는 사람은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가 믿을 수 없다 이러겠는데요.
김영순: 그것은 북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저는 북한에서 요덕 수용소에 70년대에 들어갈 때 보위부 312호 예심과에서 두 달 조사받고 들어갔어요. 8식구 중 남편은 미리 없어지고 7식구가 갔어요. 저는 70년 8월 1일 보위부 312호 예심과 외국여행자 상점 상업부 지도원 하다 들어가 9년 있다가 79년에 나왔어요. 그리고 나와서는 장진 중흥광산 금광에 배치 받아서 3년을 정말 짐승처럼 노동을 했죠. 그다음에 사회에 나왔으니까 함흥 시내에 나왔다가 평양 있을 때 공군협주단에 있던 분이 파출소 소조장을 하더라고요. 통남분주소장을요. 그분을 만나서 얘기 했어요. 그런데 그분은 저는 애국열사 가족으로 다 평양에 사는 줄 알았기에 제가 거짓말을 했어요. 남편이 광산기술자로 광산에 배치를 받았는데 죽고 없으니까 함흥에 거주 좀 시켜 달라고 했죠. 그래서 뇌물을 고이고 함흥에 살았어요. 81년 7월 24일 함흥에 나와서 탈북 때까지 19년을 함흥에서 살았어요.
평양에 살던 김영순 여사가 요덕 수용소 즉 15호 관리소에 수감됐던 것은 김정일의 처 성혜림과 동기동창으로 성혜림을 잘 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1호 가계에 대해 발설한 것이 죄가 됐던 겁니다.
기자: 여사님은 북한 평양에서도 고위급만 상대를 했잖습니까?
김영순: 최고죠. 김일성과 악수하고 김일성이 배푸는 연회에 참가한 사람으로 한국에 온 것은 김영순 뿐이라고 황장엽 선생이 살아 계실 때 말했어요.
기자: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 느낌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됐을 텐데 어떤가요?
김영순: 북한에서 살 때는 세상을 못 보잖아요. 세상을 못보니까 김일성에게 늘 해방의 구세주로서 늘 감사함을 느끼고 살았죠. 각 나라 수반들 말리 대통령, 사우디아라비아, 쿠바, 이라크 대통령들을 봤고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이런 나라도 해방 이후에 북한의 외교가 가까웠어요. 그런 차원에서 멋있다. 조선인민군 협주단 무용 배우 예대 1기생으로 또 최승희 제자로 활동할 때는 정말 멋지게 살았죠. 또 오빠가 서울을 점령한 사단의 장교로 김일성과 조국개선도 같이 했고 경상북도 안동 사나이로 25세 대령으로 그 오빠가 포항에서 국군 포사격에 사망하고 내가 공로자로 애국열사 가족으로 김일성 선물도 받던 집에서 승리거리 창전동 고급군관 아파트 일용관 3층 6호에 살때는 정말 긍지높게 살았죠.
기자: 미국 대통령을 만났을 때는 느낌이 좀 달랐을 것 같은데요.
김영순: 좀 달랐어요.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는 대통령도 만나도 별 볼일없는 사람도 만나주고 하는구나. 참 자유민주주의가 좋구나 하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기자: 언론보도와 직접 만난 대통령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김영순: 신문 언론에서 볼 때와 달리 실물을 보니까 상당히 아량이 있고 웃음 가득한 최고의 겸손을 가진, 정말 북한 사람도 허물없이 대해주는 것을 보면서 참 서구사람은 정말 모습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많았어요. 상당히 감사했고 내가 인생말년에 이런 대통령 앞에도 앉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김영순 여사는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협주단에서 전문배우로 입대해서 당대회 공연, 국가연회 등 중요한 공연에 참석 했던 핵심계층입니다.
김영순: 김일성과 악수도 하고 연회에 참가해 보고 했을 때 우리가 수행비서한테 수령님께서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그런 것은 알아뭐해? 이래서 어린 나이에 내가 말해줘요 하면 술 마시기 전에 참기름을 한술잔 마시면 위벽에 참기름이 베서 술이 흡수 안된다고 했어요. 20살 때 연회 가서 그런일도 있었어요.
이번 미국 방문에서 대통령을 만난다는 사실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에 갔을 때 알았다고 했는데요. 워싱턴에 도착해서는 대통령 집무실 방문에 앞서 보좌관들과 간단히 얘기를 나눴다고 전했습니다.
김영순: 밖에서 좀 얘기 하다 들어갔어요. 들어가서는 3분 정도 얘기 하라고 해서 할말했고 나올 때 사진을 찍었어요. 한사람 한사람 다 사진을 찍었어요.
북한에서 최상류층에서 살다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생지옥 요덕 수용소에 수감됐던 김영순 여사. 하늘에 날아다니는 것, 땅에 기어다는 것, 보이는 것은 모두 잡아먹어야 생존할 수 있었던 정치범 수용소를 나와 2003년 7월 15일 제 3국을 경유해 남한땅을 밟았습니다. 그후 북한의 인권 실상을 증언하기 위해 스위스 유엔, 영국 국회 상원의회 방문, 벨기에 EU연합 27개국 위원장 면담, 남한 국회 청문회 출석해 증언 하는 등 황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이번 백악관 방문도 김영순 여사의 기억에 또렷이 각인 될 겁니다.
기자: 뭐가 가장 인상깊었습니까?
김영순: 백악관 내부를 보니까 화려하고 고품격이고 대단하더라고요. 어쨌든 별볼일 없는 김영순이란 존재도 트럼프 대통령일 가서 만나고 왔구나 해서 영광스럽고요. 상당히 긍지감이 생기고 그랬어요.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요덕 수용소 출신 김영순 여사의 이야기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