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년퇴직-한국전력공사 20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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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 중에는 의사가 되거나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도 많지만 직장인으로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직종에 따라 정년의 나이는 다르지만 오늘은 전기를 생산공급하는 한국전력공사에서 20년을 근무하고 퇴직한 허광일 씨를 통해 남한의 직장에 대해 알아봅니다.

파주시 대성동 마을 견학시 마을 회관에서 소개 시간을 갖는 허광일 씨.
파주시 대성동 마을 견학시 마을 회관에서 소개 시간을 갖는 허광일 씨. 사진 제공-허광일 씨

허광일: 처음 일반직원에서부터 대리, 과장, 부장 그다음이 지사장이고 본사로 가면 전무, 상무, 사장으로 돼있는데 …

허광일 씨는지난 1986년에 러시아 벌목장으로 외화벌이를 일꾼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남한에 산다는 외가쪽 친척을 찾다가 공개수배를 당해 2년 반을 숨어 지내다가 1995년에 러시아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의 중재를 거쳐서 남한으로 갑니다. 그리고 1996년부터 한국전력공사에 입사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요.

허광일: 제가 들어갔을 때 저와 나이가 같은 사람들이 과장을 하는 직원이 몇 분 없었습니다. 정규  시험은 2년에 한 번 있는데 거기에 합격해야만 승진이 됩니다.

기자: 선생님이 퇴직할 때의 직급은 무엇이었습니까?

허광일: 과장이었습니다.

기자: 직급과 상관없이 매년 호봉은 오르는 겁니까?

허광일: 네, 매년 호봉은 오르고 남자는 군대를 갔다오면 3년을 쳐줍니다. 저도 북한에서 군제대를 해서 입사할 때 3년을 받아서 처음시작할 때 5호봉에서부터 시작해서 정년퇴직할 때는 24호봉으로 아마  퇴직을 했을 겁니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남한입국 탈북자의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던 시절이라 정부가 탈북자 직업도  알선을 해줬습니다. 남들과 경쟁없이 특별채용으로 공사에 입사를 하게 됐지만 일단 직장생활이 시작되고 부터는 탈북자라고 해서 다른 직원과 다른 특별대우는 없었습니다.

허광일: 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남한테 지지말자 모든 것을 해도 남한테 이기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입사해서 3년만에 수금경쟁이 붙었는데 전국 1등을 했습니다. 근무지인 서울지부 동부지사가 전국 1등을 했는데 거기서 수금부분에서 제가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 표창도 받았습니다. 그때 생각한 것이 한국은 자기 직무에 따라 능력을 발휘하면 바로 성과로 나타난다는 거였습니다.

러시아 벌목장에서 검침원으로 일했던 허 씨는 남한에서 전기료를 수금하는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그만한 대가가 차려진다는 것을 알고 부터는 다른 걱정은 할겨를이 없었답니다. 처음  직장생활을 했을 때 허 씨는 이미 40대 초반 나이었습니다.

허광일: 사실 처음 탈북자가 회사에 입사해 주변 사람들이 신기해도 하고 호기심도 갖고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부정적이었습니다. 내가 나이 먹었다고 없이 보고 이러나 아니면 북한 출신이라고 나를 깔보나 하고 선입견이 있어서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1년정도 지나니까 내가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 직장에서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후에는 제일 먼저 회사에 출근해서 직원들이 오면 커피도 타드리고…

지금 생각해봐도 남한의 직장생활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어려웠던만큼 그 상황을 극복하려고 애썼는데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허광일: 김대중 정부 들어서 고객을 왕으로 모시자는 운동이 일어서 저 같은 상황에서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한전에 오는 고객은 호객을 갖고 오는 사람보다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습니다. 특히 수금과는 이런 고객을 상대하는데 정말 저도 북한에서도 들어보지 못한욕과 상상할 수 없는 모욕을 당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우리가 강력히 대응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 문제로 저는 처음에 어려움이 있어서 힘들었는데 이것도 한 2-3년지나니까 충분히 넘길 수 있었고…

허광일 전기를 생산해서 일반 주택이나 사업체에 공급하고 매월 그 사용료를 받는 부서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정이 있어 전기료를 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무조건 돈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이다 보니 웃으면서 찾는 사람보다는 화를 내는 고객을 매일 상대해야 했습니다. 일은 사무실에서 전화로 하기도 하지만 현장을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허광일: 수금은 두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역관리를 하다보면 전화로 먼저 하고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잠적한 분도 있고 한데 이런 공장을 하다가 부도난 분은 전기료가 한두푼이 아니거든요. 심지어 천만원 정도가 되는데 이런 것을 추적하다보면 결과적으로 현장을 방문하고 소재파악하고 찾아가서 돈을 받아야 합니다. 한전 직원으로서 어찌보면 상당히 괴로울때가 많아요. 왜냐하면 고객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분도 있고 의도적으로 전기요금을 떼먹으려는 사람도 있는데 후자는 저희가 강력히 요구하지만 정말 어렵게 살다가 부도를 낸분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하지만 회사 원칙은 일단 수금은 해야 하니까요. 이런 문제로 갈등을 겪은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만 있다면 20년동안 회사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업무 중 짜증 스러운 일은 일과 후에 동료들과 즐거운 자리를 통해 해소하니 직장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허광일: 저는 한전에 근무하면서 회식은 원없이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회식문화가 없습니다. 일단 식당과 풍족한 음식을 동료들과 나눌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없었고요. 그런데 한전에서는 회식자리를 통해서 직원 상원간 유대 그리고 상사와 부하직원의 유대가 회식자리를 통해 많이 개선되고 친해지는 것같더라고요. 회식자리를 통해서 오해가 풀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 신뢰가 쌓이고 하니까 기다려졌습니다. 저희는 일주일에 두 번은 회식이 있었습니다.

남한 직장일들의 회식 문화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할 정도로 유별난 점도 있는데요.

허광일: 회식 자리가 1차부터 시작해서 4차까지 가기도 했는데 아마 지금은 회식문화가 상당히 간략화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다닐때는 보통 회식자리가 제일 잘 사는 사람 결혼식에 가서 먹는 정도가 우리 직원이 먹는 회식자리였습니다. 회식문화가 1차 저녁 식사하면서 소주한잔 하고 2차 맥주집가서  마시고 3차가 노래방입니다. 정말 노래방에서 일주일 쌓였던 스트레스를 마음껏 노래부르고 나면 다 풀립니다. 그리고 집에 올때보면 걸음도 가벼워지고 합니다.

이렇게 허광일 씨는 60세 정년퇴직 나이가 됐을 대 2년 연장을 해서 만 62세에 정든 일터를 떠났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가던 곳을 이젠 안가도 되게 된 겁니다. 맘껏 늦잠을 자도 되고 업무에서 해방이 됐는데 한편 소속감을 잃어 허전하기도 했습니다.

허광일: 당연하죠. 왜냐하면 20년 동안 정말 정든 회사를 떠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만62세부터 연금이 나와 생활에 문제는 없지만 조직문화를 통해 생사고락을 나누던 직장을 떠난다는 생각에 인생의 한부분이 떨어져 나간다는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일 겁니다.

허광일 씬 지난 1996년 한국전력공사에 입사해서 2015년 정년퇴직 합니다.

허광일: 제가 더더욱 한전에 대해 내가 정말 좋은 회사에 근무했다고 느끼는 것이 저와 같은 1954년생들이 서울본사에서 환송모임을 했습니다. 거기서 연회를 하고 그동안 수고 했다며 상금도 받고 했는데 부부동반으로 잔치를 합니다. 그 모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집사람과 같이 갔는데 집사람이 당신 정말 괜찮은 회사에서 일했어.  내 일생에 오늘이 제일 행복했어. 이 말을 들었을 때 내 어깨에 큰 왕별이 있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허광일 씨는 한국전력공사에서 일한 20년 직장생활이 제일 보람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궁금증을 풀어드립니다. 오늘은 허광일 씨의 남한에서의 직장생활 20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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