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봄 국제 친선 예술 축전
2013.04.23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폐쇄적인 북한에서 유일하게 정례적인 국제 축제로 열리는 “4월의 봄 국제친선예술축전”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은 김일성 생일 70돌을 맞는 1982년부터 시작됐습니다. 작년까지 총 28회 열렸는데 올해까지 합치면 세 번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우선 올해는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축제를 개최하지 않았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북한은 남한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들에게 까지 서울을 떠나라는 식의 유치한 전쟁 협박을 해댔습니다.
83년에는 김일성의 만류로 축제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외국인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니라 국제친선예술축제 비용을 북한이 전부 부담 한다는 사실을 알고, 구걸 축제라며 못하게 했습니다. 그럴 외화가 있으면 인민들의 옷을 생산할 공장을 짓는 것이 더 낫다면서 말입니다. 더구나 그 시기로 말하면 김정일이 수령 신격화를 자기의 유일지도 체제 구축에 이용하던 때여서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인민 경제 주도권으로 주석의 절대 권한을 되찾으려 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비준 제 완성으로 당 조직부가 유일지도권한을 꽉 쥐고 있던 상황에서 금수산 기념 궁전의 주석으로만 살아야 했던 김일성은 84년부터 다시 개최된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제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4월의 봄 평양친선예술축전에 참가했던 외국인들의 반발도 심했습니다. “자주, 평화, 친선”이라는 축전 이념만을 믿고 국경의 차이나 인종 차별을 초월한 친선의 봄 국제 축제로 알았었는데 자기들의 신성한 음악이 독재자, 그것도 개인 우상화에 이용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했던 것입니다.
특히 축제의 절정인 축제예술종합 공연의 절차와 방식에 외국 예술인들은 경악했습니다. 음악 전문성이나 재능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우선 순위로 종합공연을 구성했던 것입니다. 축제 참가자들에게 김일성이, 공연을 관람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도록 세뇌시키는 신격화 강요도 해괴한 경험이었습니다.
결국 축제의 규모는 나날이 초라해졌고, 김정일 정권은 김일성에 대한 세계인의 존경심을 조작하는 차원에서 축제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나날이 더 많은 국고를 탕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88올림픽에 대응한다며 국고를 털어 북한이 자처한 1989년 세계13차 청년학생 축전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제 자금 조성에도 최대위기를 가져왔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로 말하면 사회주의 동구권 붕괴로 북한의 합법적 외화벌이 기반도 완전히 붕괴됐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배급제 붕괴로 인민들이 굶어 죽는데도 체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식량구입에 써야 할 돈을 외국인들을 초청하는 잔치 비용에 탕진했습니다.
김일성 사후에도 김정일은 외국인들의 추모 정서를 조작한다며 대량 아사의 “축제”를 이어갔습니다. 이를 위해 김정일은 1996년 북한 내 각 기관들이 자체로 식량 문제를 해결하도록 외화벌이 회사를 허용할 때에도 그 권한을 제일 먼저 당 선전선동 부에 주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회사가 바로 “조선물류진흥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외화벌이 목적은 단 하나,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비용 조달입니다. 일 년 외화벌이 계획이 오백만 달러인데 외국 음악가들을 초청하는 비행기표나 체류비용, 선물, 축제 상금을 위해 쓰일 돈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당 산하 회사 중 가장 많은 수입, 수출 특권이 부여된 회사이기도 합니다.
당 38호실과 동등하게 남북 경협 권도 갖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객들이 즐겨 관람했던 평양 교예 단 공연 관람 비용도 이 “조선물류진흥회사”로 흘러 들어가 거기에서만도 년 간 200만 달러의 수입을 챙겼습니다. 남한 관광객들이 평양을 가면 반드시 들르도록 안내하는 평양시 중구 역 련화 동에 위치한 “조선민속식당”이 있는데 그것 역시 이 회사 소속입니다. 남한 관광 객들은 자기들이 지불한 음식 값이 이렇듯 김 씨 일가 신격화를 위한 국제 축제에 보태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당 선전선동부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을 준비하는 시점은 년 말부터입니다. 우선 축제의 품위를 부각시킬 수 있는 유명 음악가나 예술단을 섭외하는데 많은 돈을 할당합니다. 세계음악 콩쿠르에 입상한 음악 인들은 정치적 이유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매수하는가 하는 것이 외국에 파견된 대사관 문화 참사들의 주요 업무가 됩니다.
해외 교포들이나 구 소련, 그리고 과거 사회주의 동구권 나라들에는 인맥이 남아있어 비교적 수월하지만 미국이나 서방과 같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전문 음악가들은 초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의 음악가들을 초청하는 것이 정치적 효과가 더 크기 때문에 북한 문화참사들은 그야말로 구걸 초청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를테면 전문음악인이 아니라 거리나 카페에서 생존을 위해 음악을 파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공짜 여행을 약속하는 식입니다. 정치적 명분을 위해 전문성이나 재능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음악가들 같은 경우 평양에서 돈을 좀 쥐어주면 “김일성 장군의 노래”라도 부를 수 있어 선전가치도 더 큰 것입니다.
4월의 봄 국제친선예술축전은 82년 1차 때부터 3차 때까지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이후 최대한 축소해서 들인 축제비용이 오백만 달러이니 그 최소 금액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28회에 들어간 외화 만 총 1억4천만달러에 달합니다. 김 씨 신격화의 절반만큼이라도 인민을 돌볼 줄 알았던 정권이었다면 북한이 오늘처럼 세계 최빈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