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진실
2013.05.07

북한에선 김일성을 한 생에 두 제국주의를 타 승한 영웅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6.25북침을 막아낸 전설적 영웅이라고 김일성을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6,25는 김일성의 남침전쟁이었고, 또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에 의해 만들어진 민족의 비극이었습니다.
최근 남한의 유명 보수논객인 조갑제 선생은 6.25전쟁의 진실과 관련한 새로운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실 북한인민 여러분은 객관적인 자료와 증언이 고발하는 김일성의 6.25남침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될 것입니다.
김일성의 남침전쟁 이틀 후인 1950년 6월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련이 불참하게 됩니다. 소련의 불참은 미군 파병을 도와 유엔 파병 군이 한국으로 진입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2005년 정 창 과 존 핼리데이가 공저한 '모택동 저서는 이렇게 설명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소련측 대표였던 말리크는 상부에, 유엔 안보리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허가를 요청하였다. 스탈린은 그를 전화로 불러내 '불참'을 지시하였다. 그는 서방군대를 (한반도로) 불러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조갑제 선생은 책에서 소련이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눈감은 것은 일본패망을 주도한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해서 묶여 있도록 하고, 소련은 대신 동구권을 자기의 안방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또한 스탈린은 자신이 던진 김일성의 남침이란 미끼를 미국이 물었으므로 중국을 시켜 함정에 빠진 미국을 치게 함으로써 독자노선을 가려는 모택동을 붙들어둘 수 있다고 자신하였던 것입니다.
스탈린이 한국전을 이용하여 미국과 중국을 이간질시킴으로써 중국을 소련진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는 데 대하여는 전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 등 많은 연구가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소련 해체와 함께 공개된 외교부 문서들 중에는 슈티코프 소련대사가 모스크바로 보고한 김일성의 발언 내용들이 있습니다.
1950년 1월17일 평양에서 열린 중국 대사의 송별 연회장에서 金日成은 술에 취한 말투로 소련대사관 참사관 이그나체프와 페리센코에게 “나는 통일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하여 잠을 자지 못한다. (1949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 동지는 남쪽을 공격해선 안 된다, 이승만 군대가 북한을 공격한 경우에만 남조선을 향해 반격해도 좋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공격해오지 않기 때문에 남조선 인민 해방과 국가통일은 미뤄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한 인민군의 공격계획에 관하여 허가를 얻고 싶다. 만약 스탈린 동지와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모택동 동지가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한 후 그와 만날 것이다. 모택동 동지는 중국의 내전이 끝난 뒤 원조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당시 스탈린은 중국이 소련의 진영에서 이탈할까 초조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때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허가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에 스탈린으로서는 한반도를 국제전쟁터로 만들어 여기에 미군과 중공군을 끌어들여 서로 싸우게 하여 중국을 약화시키는 한편, 동유럽을 자기의 안방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이렇듯 냉철한 계산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 전략을 구사 함으로서 체코 폴란드 동독 등 동구를 위성국으로 만들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반드시 모택동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중국의 개입을 꾀했고, 김일성은 모택동을 만나 북한군과 남로당 게릴라들이 남한을 간단하게 해치울 것이므로 도움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게 됩니다.
사실 모택동은 이때 한국보다 더 급한 게 있었습니다. 대만 점령을 위하여 對岸(대안)에 약15만 명의 병력과 약4000척의 선박을 집결시켜놓았습니다. 그런데 대만보다 먼저 한국을 치도록 유도한 스탈린 때문에 중국은 대만공격의 기회를 놓치게 됐고, 한때 대만을 포기하였던 트루먼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 직후 미 7함대를 보내 대만을 방어하도록 명령하면서 오늘의 대만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주은래 총리를 소련으로 보내 소련 공군의 엄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렇게 하면 미국이 소련과 정면 대결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면서 중공군에 20개 사단 분의 장비를 제공할 용의는 있지만 공군 지원은 당분간 불가능하다고 뒤로 빠져버렸습니다. 당시 미국은 만주폭격, 중공해안 봉쇄, 장개석 군대의 중공 상륙 지원, 한국에 대규모 증원군 파병, 원폭 사용 검토 등. 이는 중공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을 정면으로 공격하면 소련(당시 핵 보유)이 참전, 미국이 이길 수 없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제한 전을 선택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경솔한 야망과 달리 전쟁이 장기화 되자 김일성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휴전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합니다. 1953년 3월5일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이주 뒤인 3월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에서 휴전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3월29일 소련의 특별 대표로부터 휴전 결정 통보를 받은 김일성은 '좋은 소식을 들어 기쁘다'며 매우 흥분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김일성은 민족 비극을 불러온 6.25전쟁의 원흉이며, 또 주체의 수령이 아니라 사대주의 지도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