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지도자 면접시험을 보다

장진성∙탈북 작가
201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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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 제2차 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당시 수상의 모습.
최고인민회의 제2차 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당시 수상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일본패망과 함께 소련에 의한 한반도 내 분단 고착,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김일성이 어떻게 북한의 지도자로 선발됐는가에 대해 전 동아 일보 회장이며 서울대 교수인 김두학 선생의 회고록을 근거로 계속 보내드립니다.

김두학 선생은 해방 후 김일성 정권이 탄생되기까지 북한과 소련에서 있었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5년 동안 러시아 땅을 현장 취재했습니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 문서들,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직접 간여했던 소련 군정책임자들과 북한인들의 면담을 통해 수집한 생생한 증언을 모아 북한역사의 진실을 복원한 <비화: 평양의 소련 군정>이란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책은 필자의 주관이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성, 외무성 등 비밀문서 보관소에서 북한 주둔 소련 군정의 문서들과 자료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북한정권 창설 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 고위 장성들과 권력의 암투 과정에서 밀려나 타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북한의 전직 고위 장성과 장․차관들을 만나 북한정권 창출과 소련의 북한 소비에트화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모았습니다.

1945년 8월24일. 소련군 제88정찰여단장 대좌 주보중은 직속상관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냅니다. 보고서는 “스탈린 대원수의 특별지령에 따라 창설된 제88정찰여단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빨치산 부대들의 모범을 본받아 중국과 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이들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정치 군사전문가를 양성한다.”고 창설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매우 의미 있는 대목으로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이 치밀하게 구상한 사전 계획에 따라 창설된 88정찰여단에서 장차 한반도(북한)의 정치•군사지도자로 김일성 등을 훈련시켰음이 이 문건에서 명쾌하게 드러납니다. 또 이 보고서는 1945년 8월9일 소련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뒤 88정찰여단의 작전 계획이 모두 취소돼 88여단의 조선인 병사들은 대 일전에 참전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날 북한 역사가 자랑하고 있는 것과 달리 ‘김일성 부대가 있는 88여단이 대 일전에서 총 한방 쏘지 못했음이 소련 국방성 문건으로 명확히 드러난 것입니다.

1945년 9월2일 극동의 바실레프스키 사령부로부터 88여단의 김일성 부대 80명에 대한 입북 명령이 공식적으로 떨어집니다. 김일성 부대는 이 명령이 떨어진 지 16일 후인 그 해 9월18일 원산 항을 통해 입북해 소련군정의 지시대로 각 도시로 분산돼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을 맡게 됩니다. 참고로 소련군 제88정찰 여단은 1942년 6월 스탈린의 특별지령으로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창설됐고, 중국인 373명, 조선인 103명, 나나이족 316명, 로시안인 462명, 기타 100명 등 총 1,354명 으로 장교 149명, 하사관 358명, 병사 847명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입북하기 전인 19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한 후 그를 북한의 최고 지도자 후보로 낙점했습니다. 이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부부장 코바렌코가 증언했습니다. 이에 앞서 제1극동전선사령부 제7호 정치국장 메크레르 중좌는 88정찰여단의 김일성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상부에 보낸 후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 입북에 따른 사전 준비 작업을 합니다. 이는 1945년 9월 ‘북조선에 민주정권을 창설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과 맥락을 같이 하는 대목입니다. 소련군정 고위 책임자는 “소련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정보기관과 군이 김일성에 대한 판단자료를 올리면 이를 분석하고 판단해 스탈린에게 추천하고 스탈린이 이를 중심으로 김일성을 직접 면담해 지도자 후보로 낙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소장은 “북한 정권 창출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군정이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고 모두 하바로프스크 사령부를 거쳐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진행됐다”고 밝혔습니다. 1945년 9월20일 스탈린은 “북조선에서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지령했습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북조선에 위성정권을 세우겠다는 최고사령관의 확고한 의지를 주둔군 사령관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 지령은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를 재 해석해야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역사는 소련이 서울의 미 군정 동향을 위시해 한반도 정세를 살펴가면서 북한에 ‘민주기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점령 초기부터 북한 만이라도 단독 정권을 세워 한반도의 ‘민주기지’로 키워가려 했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역사적인 지령’이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을 점령하고서 한달 정도를 보낸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나름대로 북조선 정세를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준비해 온 프로그램에 따라 차례대로 체계화해 군정의 가닥을 잡아 나갔습니다. 김일성의 입북을 전후해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무엇보다 급한 일은 북조선에 위성 정권을 창출한다는 큰 틀의 전략 속에서 장차 북조선 정권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있었습니다. 아울러 소련의 위성 정권과 지도자 양성의 토양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과제도 시급했습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련이 북한에 대해 실시할 정책은 다중 구도였습니다. 즉, 군사적 점령과 군정 실시라는 현실적 목표, 북한을 소비에트화해 한반도와 극동의 민주기지인 위성정권을 창출한다는 내면적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이 때문에 소련군정은 조만식과 같은 민족 지도자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주목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과 직접 연계된 공산주의 조직이었습니다.

먼저 소련군정은 이북5도 열성 자 대회를 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했고 이어 지도자 부상을 위해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김일성을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띄우는 등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 시작됩니다. 이어 조만식을 설득하여 다 당제 틀을 갖추기 위한 조선민주당 창당을 도 웁니다. 이런 과정에서 소련군정 고위 장교들은 조만식을 데리고 ‘요정 정치’판까지 벌이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소련의 고문정치와 김일성의 사대주의 정치가 어떻게 한반도 내 분단을 고착시켰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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