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만든 구 소련의 ‘식민지’ 북한

장진성∙탈북 작가
201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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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북한 국민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해방 후 북한 국민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인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일본 패망 후 어떻게 한반도에 분단이 고착됐고, 또 김일성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전 동아일보 회장이며 서울대 교수인 김두학 선생의 회고록을 근거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1945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체계 있는 소비에트화를 조기 실현하기 위해 소련군정 내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으로 로마넨코 소장을 임명합니다. 그리고 소련군에서 경제의 모든 분야, 즉 공업, 농업, 수송, 재정, 통신 등의 전문가들과 교육 문화, 보건, 사법 분야 전문가들을 입북시켜 로마넨코가 지휘하는 민정관리국에 배치합니다. 이와 함께 외형상으로는 북한 인민대표들로 구성된 임시 인민위원회를 두어 행정 총국을 관장하는 것처럼 하고, 실질적으로는 임시 인민위원회와 행정 총국을 소련군정이 통제하도록 했습니다.

소련군정도 인민위원회 체제에서 공산당이 인민위원회를 지배하는 소련 식 스탈린 체제를 갖추게 됐습니다. 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재무인민위원회와 소련 국립은행 대표들로 구성된 전문가들을 평양에 보내 조선중앙 은행을 창설하고 이 은행에 차관을 제공하는 전권을 부여하도록 했습니다.

소련 군정은 한마디로 ‘고문정치’였습니다. 평양의 군정사령부는 물론 각 지역의 위수사령부까지 소련으로부터 급파된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문들이 포진했습니다. 군정 사령부 군사회의(일명 정치사령부)에는 이른바 정치장교들로 짜여 있고 정치고문회의는 국방성 외무성 등 소속으로 위장한 정보기관 정치 장교들로 구성됐습니다.

또 각 도의 위수사령부에는 민정사령부의 직속인 대좌 급 고문들을 두어 이들이 지역 위수사령부를 지도하도록 했습니다. 이들 고문들은 대부분 소련군 군단과 사단 정치부장들이었습니다. 전체 6개 도 인민위원회는 외형상으로는 인민 자치기관이었으나 구성원인 위원은 선출된 것이 아니라 소련군정 사령부가 임명했고 인민위원회를 지도하는 소련군 고문이 배치됐습니다.

또 소련군정 산하에 설치된 10개의 행정 국에도 외형상으로는 조선인들이 국장을 맡고 있으나 각 국장 곁에는 소련군 고문을 배치, 사실상 행정 국을 끌고 가도록 했습니다. 특히 후일 조선인민군 창설의 모체가 된 보안대, 철도경비대, 평양학원, 중앙보안간부학교, 보안간부훈련대대본부, 인민집단 군 총사령부 등 각 군사학교와 훈련소에 소련고문단을 배치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평양에 소련군정을 설치하면서 소련전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 2-3세 가운데 대학 교육을 받은 정치, 군사, 경제, 정보, 교육, 기술 문화 등 분야별 전문가 428명을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에 급파했습니다. 이들은 초기에 군정 사령부와 정치사령부 민정사령부 각 지역 위수사령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임시인민위원회 군 간부학교 대학, 언론, 문화단체 등 각 분야에 파견, 북한 정세를 파악해서 소비에트 화 전략 수행 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케 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정권을 창설하면서 이들을 당과 정부의 부 책임자로 앉혀 소련을 대신해 사실상 위성정권을 관리토록 했습니다.

소련공산당의 명령으로 평양에 급파된 소련 파는 북한에 소련의 공산주의를 이식하고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위대 역할을 합니다. 1945년 12월25일. ‘소련군의 막강 실세’인 소련군 총 정치국장 쉬킨 대장은 “1945년 9월21일자 최고사령부(스탈린)가 지령에서 언급한 ‘북조선에서 민주정당 사회단체 등의 광범위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민주정권 창설을 겨냥한 노선이 대담하게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의 특별보고서를 외무장관 몰로토프에게 보고합니다. 이 보고서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거쳐 스탈린에게도 보고됩니다. 따라서 이 보고서의 결과로 평양의 소련군정 주도로 북한 정권 창출을 위한 ’민주 개혁 조치‘들을 숨 가쁘게 진행 했습니다.

한편, 1945년 10월 5일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 폴리안스키는 “여운형에 대해 긴급 보고하라”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긴급지령을 받고, 평양의 소련군정을 통해 여운형의 신상정보와 정치적 성향 등을 상세히 보고합니다. 이 보고서는 극동 군 총사령관을 비롯 소련군 고위지도부를 거치게 됩니다. 평양에 소련군정 사령부를 설치한 지 불과 한 달여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모스크바 당에서 여운형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 소련군 극동총사령부 제1 극동전선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이 미, 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던 와중에 느닷없이 여운형을 수상으로 하는 통일 임시정부 내각명단을 작성해서 모스크바의 당 중앙위에 긴급 보고하는 등 북한 정권 창출 과정에서 김일성과 소련군정이 여운형과 깊이 대화하고 있었던 사실 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역사적 단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45년 12월17일. 소련군정은 북조선공산당 조직 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열도록 해 김일성을 제1 비서로 선출시킵니다. 이를 전후 해 소련군정은 북조선공산당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당원들의 사상, 정치교육을 실시하고 간부를 양성하며 공산당 주위에 ‘민주주의 단체’를 결속시키고 각 도 인민위원회를 강화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합니다.

1945년 10월17일 오늘의 노동신문 전신인 북조선 공산당 조직 국 기관지 ‘정로’가 창간되고 11월3일엔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며 11월11일엔 조, 소 문화협회, 18일엔 북조선 민주여성동맹이 결성됩니다. 소련군 총 정치국장 쉬킨 대장의 ‘소련군정 4개월 보고서’의 핵심은 북조선에 아직 소련의 진지 구축을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첫째 스탈린이 지령한 북조선의 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둘째 북조선에서 소련군대를 철수할 경우 소련의 국가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고한 정치적 경제적 진지를 북조선에서 아직 쟁취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북조선을 소련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기지’, 즉 위성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 있는 문건인 셈입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빠른 기간 내에 임시인민위원회 창설과 토지개혁 등 이른바 ‘민주개혁’프로그램을 밀어 붙이라고 지령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방성, 외무성 등의 비밀 고문서와 각종자료들에서도 알 수 있듯 김일성은 스탈린의 면접 시험을 통해 지도자로 추천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만든 공화국이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 만들어진 구 소련의 식민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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