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를 위해 부풀린 프룬제 아까데미아 사건

장진성∙탈북 작가
2011.05.31
kimji_banner_hang-305.jpg 2004년 12월 북한 김정일의 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 13주년을 맞아 24일 평양 시내에 축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 가요 - “내가 지켜선 조국”)

북조선 군인들이라면 누구나 군가처럼 즐겨 부른다는 이 노래, “내가 지켜선 조국”이지요, 선군정치의 나라여서 인민들을 잘 살게 해야 할 정치 지도자도 국방위원장인 북조선, 심지어는 명곡도 이렇게 군인들의 노래라는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알다시피 김일성이 사망 전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넘겨준 권력이 바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입니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가 공식 발표된 날은 전국 중대장대회가 열렸던 1991년 12월24일입니다. 북조선만의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2·16, 4·15은 물론 4·25 인민군 창립절과 같은 기념일도 있는데 왜 하필, 김일성은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를 굳이 이 12월로, 그것도 전국중대장대회에서 급하게 발표했을까요?

김일성은 전국중대장대회 소집을 선언하기 며칠 전 김정일로부터 문건하나를 받아보게 됩니다. 그 문건에는 최근 인민군 무력 부 내에서 쿠데타를 목적으로 치밀하게 조직화하고 있는 반정부 동향이 담겨 있었습니다. 김일성을 보다 경악하게 한 것은 반정부 쿠데타의 조직구성원이 적국인 미국이나 남조선이 아니라 사회주의 소련과 결탁한 세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보의 과학적 근거는 이러했습니다.

1980년대 말 붕괴 직전에 처한 사회주의 소련에서는 개혁·개방 추세와 함께 누구보다 판단이 빠른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요원들도 발 빠르게 정보장사에 나서게 됩니다. 이렇듯 소련의 붕괴는 사실상 거대한 국가를 거머쥐고 있던 국가안보위원회의 와해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KGB 요원들은 북조선 권력 핵심 내부에 친 소련 계 조직이 있다는 첩보를 은밀히 흘렸습니다, 얼마 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받아본 그 문건에는 영원한 우방이나 친구는 있을 수 없다는 KGB의 냉정한 논리가 정말로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그 문건에 열거된 인물들은 북조선 정권이 파견한 군사유학생들이었습니다. 장군 양성기지로 불리던 위르실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 연대장 이상 간부 교육 양성 기지인 프룬제 아카데미아, 레닌그라드 군의대학, 전자대학, 공군대학 등 20개가 넘는 소련 군사대학들과 관계기관들에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인민무력부가 내보낸 군 지휘관 숫자만 해도 무려 700명에 가까웠습니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 계속해온 평양 내부에 친 소련파가 득세하기를 원했던 소련으로서는, 북조선이 이렇듯 현직 군 지휘관들을 대대적으로 유학 보내는 기회를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 포섭인원들은 불과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문건을 전달 받은 김정일은 당시 인민무력 부 보위국장이던 중장 원응히에게 인민 무력부가 그동안 대(對)소련 정책에 안일하게 대응해왔었다는 데 대한 의견도 첨부해 실체를 부풀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어 조선인민군총정치국과 총참모부 고위군 간부들을 회의장에 모아놓고 사상투쟁회의를 열도록 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 직위를 요구하자면 사태를 심각한 수준으로 왜곡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사실 KGB 문건을 보고받기 전날까지 절대적인 친소정책을 추진해온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정일 이었습니다. 그 사례로 북한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라모나 기지를 들 수 있습니다. 냉전시기 소련은 미국의 포위 구상에 맞서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평양 근교에 소련 군사위성 통신결속소를 세우는 방안을 제기했습니다. 이미 1960년대 북조선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크든 작든 또 다른 형태의 주둔을 반대했지만 김정일이 완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수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김정일은 군사 암호로 ‘208조’로 불린 소련 위성 통신결속소 성원들과 208조 단장이던 백 러시아 군관구 부사령관 웨리드좌노프 중장을 위해 평양 시 중심구역에 호화주택도 짓게 했습니다. 1989년 소련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라모나 기지를 철수할 때에는 미림군사대학에 나와 있던 40여 명의 소련 군사대학 교수들까지 모두 목란 관에 초청해서 파티를 열고 영원한 조소친선을 역설했던 김정일 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인민무력 부 보위 국 국장 원응히가 준비한 보고서를 들고 금수산 의사당을 찾아가 김일성을 압박했던 것이죠. 1991년 8월18일 소련의 비상사태와 그로 인한 냉전구도 해체를 새삼 열거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부의 재정립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 우선 조건으로 최고사령관 추대를 강력히 요구했고 이미 아무 실권이 없는 김일성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먼저 군부 내 친 소련파를 척결하는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을 지휘하게 됩니다.

그 첫 대상으로서 4군단 참모장으로 있다가 위르쉴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 2년제 과정을 마치고 인민무력 부 부 총참모장으로 승진했던 상장 홍계성,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현수의 아들인 인민무력 부 작전 국 교도지도국 담당 부국장 강운용, 소련 주재 북조선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인민무력 부 대외사업국 국장으로 일하던 김학산 등 군 고위급 인물 수십 명이 긴급 체포됐습니다. 피해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력 부 보위 국에 뒤질세라 국가보위부도 KGB가 군사대학 유학생들만을 상대로 공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하에 사건을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 군사대학이 아닌 일반대학 유학생들도 경쟁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북조선의 지식인들은 우수한 유학인재들이 한꺼번에 숙청된 1992년을 평양의 문화대혁명이 라고 합니다. 당시 군부 내 장성들 사이에서도 조용히 이런 말이 오고 갔습니다. “군 복무는 둘째 치고 병사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이 최고사령관이 되더니 적군이 아니라 아군 장성들을 잡는 최고사령관이 됐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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