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대성산 혁명열사릉 동지들 옆에 묻히고 싶었던 김일성

장진성∙탈북 작가
2011.08.02
tomb_nk_memory-305.jpg 지난해 9월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에 즈음해 당 간부들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MC: 탈북자 장진성 씨가 전하는 김 씨 일가의 실체, 노동당 통일 전선부 대남 정책과 연락소 부원이었고 김정일을 두 차례나 접견한 일급작가 이었던 장진성 씨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60년 독재 체제와 현대판 봉건 세습에 대한 진실과 배경을 밝힙니다.

(음악: 조국의 노래 “조국은 너를 알게 되리")

김일성 사후 북한은 김일성 침실에서 발견된 유품이라며 두 가지를 공개했습니다. 하나는 김일성 금고 안에 들었던 건국동지 김책의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성산혁명열사릉을 향해 창문가에 세워져 있던 포대경이었습니다. 북한 정권은 이를 두고 김일성의 동지애에 대해 대거 선전하였습니다. 즉 금고 안에는 돈이 아니라 동지애가 들어있었고, 포대경으로 동지들을 마지막까지 보살폈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김일성은 그 포대경으로 주석궁 마주 편에 있는 대성산혁명열사릉 항일동지들의 반신상들을 자주 보곤 했다고 합니다.

또한 새해 때마다 항일동지들과 측근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소원은 죽은 다음 대성산 혁명열사릉 동지들 옆에 묻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겠다고 김정일 당 조직비서도 내게 약속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그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김일성 사후 항일동지들이 수령의 유언대로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시신을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공동명의로 된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바쳤지만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수령의 교시는 곧 법이라며 누구보다 충성심을 과시하던 김정일이 왜 김일성의 유언을 위반했을까요?

그것은 항일혁명선배들에 대한 김정일의 거부의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북한의 국가이념은 주체사상의 뿌리를 항일전통으로 내세웠지만 김정일의 권력 철학은 김일성의 측근들이었던 항일동지들을 시종일관 배격하고 견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6.25전쟁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 정권의 권력구조는 지금처럼 수령 유일지도체제가 굳어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김일성의 항일 경력과 동등하게 다른 항일빨치산들도 자기의 위업을 내세우며 각자의 목소리를 높였고, 그래서 정권 안에 여러 계파가 형성돼 있을 때였습니다. 때문에 김일성도 자기 머리가 나이보다 일찍 백발이 된 원인은 당 안의 종파들 때문이었다고 늘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권력 혼동 속에서 김정일의 존재는 더욱 보잘 것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모택동의 부인 강청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자 북한에서도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과 그 자녀들이 모두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에 줄을 서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울 때였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김정일에겐 권력초기부터 김평일과 함께 그를 지지했던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까지도 모두 정치적 적수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여 중국에서 강청이 숙청되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김성애도 고립될 때 김정일은 김평일을 동조했던 빨치산 출신들까지 앞장서 비판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과 김정일의 권력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계기는 1966년 김정일의 당조직부 책임지도원 임명을 위한 회의에서였습니다. 김영주 측근들까지 가세하여 김정일의 당조직부 입성을 세습정치로 비판하자, 결국 김정일은 당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김정일은 그때부터 김일성 신격화와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의 항일역사를 왜곡하는 선전선동 조작으로 자기의 지위를 굳히고 그 정치적 배경으로 1973년 다시 당조직부에 도전하게 됩니다. 김정일의 당 선전선동 지도력에서 후계자로서의 정치적 수완을 발견한 김일성은 당시 당 조직비서였던 김영주를 설득하여 내각 부총리로 옮겨주는 조건으로 김정일을 당조직부 과장으로 임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김정일은 온갖 굴욕을 참으며 빨치산 특권층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항일전통에 근거한 국가이념화와 그 실천에 주력합니다.

그러나 당 조직비서로 임명되자 김정일은 자기 권력지반 강화를 위해 노동당의 유일권력화를 단행하게 됩니다. 그 전까지 북한의 권력기관주체는 노동당과 인민경제를 전담하는 내각, 이렇게 양대 구조로 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당시 안정됐던 경제를 이용하여 김일성유일지도사상 명목으로 사상제일주의를 주장하며 당 절대주의 정치를 하게 됩니다. 그 주된 목적은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을 견제하고 무력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 과도기인 사회주의 완성을 위해서는 경제가 우선이라고 봤기 때문에 내각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최측근들이 내각에 배치돼 있었던 것입니다.

김정일은 그러한 권력질서를 그대로 두고서는 자기의 권력을 절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 세계의 중심을 사람으로 규정한 황장엽비서의 인본주의 주체철학을 수령이 우선이라는 수령주의 관념철학으로 왜곡하고, 그것을 근거로 사상의 전위부대인 당의 절대화를 실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당과 내각의 양대 기둥에서 있던 북한 정권은 김정일이 당 조직비서가 되고나서 졸지에 당의 지도만 받는 절름발이 국가가 됩니다. 김정일은 당조직부 인사권을 토대로 간부들의 비리를 추적하는 당조직부 검열 4과를 신설하고, 이 체계를 확대하여 당 조직비서 유일비준제도를 완성하게 됩니다.

나중엔 그 권력으로 내각의 행정결정권까지 독점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 가장 먼저 숙청 된 사람들이 과거 자기의 세습을 반대하며 김평일을 내세웠던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이었습니다. 혁명선배로 존경되어야 할 그들이 불만 특종세력으로 커지자 김정일은 빨치산 출신 자녀들을 아예 중앙당에 받지 말도록 당조직부 내부 간부원칙까지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김정일이 그 자녀들에 대해서까지 혐오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동시대 인물들로서 김정일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증언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빨치산 일가라는 특권층 의식 속에서 김정일과 동등하게 자란 그들에게 김정일은 신격화할만한 존재도, 심지어는 후계자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현재 김정일의 최측근들 중 빨치산 자녀들이 있다면 최현, 오중성의 아들들인 최룡해 오극렬밖에 없습니다. 그 둘마저도 최룡해는 청년동맹 비서를 걸쳐 황해북도 도당책임비서, 오극렬은 당 작전부장, 이렇게 중앙당이 아닌 외곽기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이 지방 당이나 내각, 군부로 밀려나는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김일성의 항일동지들은 당 조직부 인사억제 규정 비밀까지 알게 되자 집단적으로 금수 산 의사당으로 찾아가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김일성은 주석궁 주인일 뿐, 더는 당 총비서도, 주석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항일동지들을 만나는 것조차 사전에 김정일의 결제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돼 버립니다. 아마 김일성은 말년에 세습정치에 대해 반성하고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와 함께 피와 목숨을 나누었던 항일동지들까지도 본의 아니게 배신할 수밖에 없는 제 처지를 두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움을 넘어 참회하는 심정으로 말년을 금수 산 창가에서 포대경으로 대성산열사 릉 동지들의 흉상을 자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김일성이어서 유언도 절절했겠지만 김정일은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김일성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영구 보존된다면 빨치산 출신 혁명1세들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더 커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을 견제하고 배격했던 자기의 정체성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불안심리를 반영하듯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 뜬금없이 “혁명1세들에 대한 존경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한 도덕”이라는 논문을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합니다.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던 그 간절한 유언마저 이루지 못한 김일성은 죽어서도 편치 못한 채 지금도 금수산 기념궁전에 홀로 누워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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