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정일 정권을 위협하는 북한의 시장

장진성∙탈북 작가
2011.10.18
sweet_potato_shp-305.jpg 평양 고려호텔 앞의 군밤, 군고구마 판매대. 출퇴근길 시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 이 시간에는 김정일 정권에 가장 큰 체제위협 요소인 북한 시장의 변화 과정과, 그 확대 배경, 그리고 원인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1990년 초반까지 북한에 시장은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줄이기 위해 농민들에게만 허락했던 원시적인 농민시장이 고작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대량아사가 발생하자 배급붕괴를 인정한 북한 정권은 초기에 이 농민시장을 통해 쌀이나 간장 같은 생존식품 판매만을 허용하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시장 문을 열었더니 쌀을 파는 사람보다 쌀을 사기 위해 가장물을 내다 파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결국 북한 정권의 초기 의도와는 달리 시장은 주민들의 단순한 생존공간이 아닌 수요와 공급의 주요 공간으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인 1996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주민들이 해당 직장들에 소속되어 시장을 그냥 쳐다보기만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계속 배급을 주지 못하자 직장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북한 정권은 대량아사에 대량탈퇴라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을 겪게 됐습니다.

급기야 북한 정권은 1996년 초 기관들이 자체로 벌어서 소속 직원들에게 식량공급을 하도록 지시했고 그때부터 무역회사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나게 됐습니다. 무역회사는 많이 만들어졌지만 문제는 외화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유일한 외화금고인 김정일 당 자금 관리 39호실, 38호실이 굳게 문을 닫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성을 비롯한 어느 기관도 중국과의 무역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북한에서 석탄, 광물, 목재 등 자원들을 주면 중국 상인들은 대신 쌀을 줬는데 이런 물물교환 형태의 무역이라도 제대로 가동되게 내버려 두었다면 아사자가 300만까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물교환 때문에 수출 허가는 해 주었는데 충성의 외화자금이 들어오지 못 한다며 김정일은 1997년 국내 실정은 안중에도 없이 현금거래의 무역만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北中무역이 냉각되며 쌀이 들어 오지 못하게 됐고, 국가 기관의 신용을 믿고 투자했던 중국 상인들 또한 빚더미에 오르게 됐습니다. 김정일은 혹을 떼려다 혹을 더 붙인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이란 국가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중국 상인들은 모든 거래를 현금화 하자고 했고, 그래서 북한무역은 기관이 아닌 돈 있는 개인들의 활동무대가 됐습니다. 하여 돈만 많으면 과거 경력이 어떻든 권력기관에서 서로 모셔가려 했기 때문에 북한 노동당의 인사원칙도 균열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곧 주민들의 충성 심리와 가치관도 흔들어 놓는 계기가 됐습니다. 북한과 중국과의 현금거래 무역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북한 내 자본 특권층과 권력 특권층과의 결탁관계를 형성하게 한 것입니다.

권력과 자본이 결합하여 중국 상인들에게서 싸게 받은 각종 물건들을 배로 비싸게 북한에 전파시키자 시장은 도매와 소매의 구간도 자연스럽게 형성되면서 보다 활성화 됐습니다. 그러나 워낙 극빈국가라 1년도 안 돼 소비의 한계에 직면하자 중국에 빚지는 간부 자녀들도 속출했고 심지어는 살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북한 정권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위해 산재해 있는 무역회사들을 통폐합하고, 기관 특성에 맞는 품목만 수입, 수출할 수 있도록 무역회사들의 권리를 제한했습니다.

이를테면 농업성은 농작물만, 석탄공업성은 석탄, 광물만 수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결국 특권층 자녀들이 운영하는 당과 인민무력부 산하 회사들이 국내 주요 광산과 어장, 등 수출생산 기지들을 비롯한 모든 수입 권한을 독점하게 되자, 그러지 않아도 허울뿐인 내각은 아무 권한도 생산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 덕에 시장만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홍성남 내각총리가 내각 산하 기관들을 살릴 목적으로 김정일에게 제안한 것이 “합의제”였습니다. 합의제란 텅 빈 국영상점과 식당들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개인이나 타 기관에 빌려주어 7:3으로 이윤을 분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관들이 숨 쉴 여유도 생기고 보다는 개인들이 가격을 주도하는 밖의 시장을 점차 국영상점 안으로 점차 끌어들여 통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적극적인 지지로 북한은 시장을 폐쇄하고 시장가격보다 조금 싼 공시가격으로 국영상점들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 길밖에 없다고 오판한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국영상점과 음식점들을 대여했지만 상황은 정 반대였습니다. 이미 비즈니스맨, 사업가 가된 특권층 자녀들이 남보다 앞선 정보력으로 강제적인 물가하락에 대비하여 갖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싸게 팔아버리는 통에 공시가격은 실행 초기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제한된 구역만 시장이었는데 그때부턴 온 나라가 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장과 국영상점 사이에 물가경쟁까지 벌어지자 김정일은 1년 후 합의제를 폐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시 집행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상점은 덜하지만 음식점 같은 경우 개인 투자자 들이 이미 기관에 합의금을 지불하고, 인테리어, 즉 실내장식도 새롭게 하는 등 시장화 돼 버린 것입니다. 기관들 또한 합의제에 적응되었기 때문에 합의제 폐기는 곧 내각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시장의 주도계층이 북한 권력층 자녀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김정일은 당조직부 4과를 통해 중앙당 비서급 이상 간부 자녀들의 현직상황을 점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경악했다고 합니다. 세습정치는 자기만의 세습이 아니라 정권안정 차원에서 충신들의 세습도 의미하는 것인데 그 자녀들이 모두 충성기관이 아닌 외화벌이 기관에 종사한다는데 대해 분노했다고 합니다. 이를 경고하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2002년 중앙당 전체 직원들을 상대로 자녀교양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강연회 이후부터 중앙당 비서급 대상 자녀들이 외화벌이 기관에 취직할 수 없도록 제한하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을 축출한다면 북한의 대외무역이 마비가 될 만큼 시장은 이미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화 돼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 특권층 자녀들은 김정일의 지시를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나라에 돈이 너무 없어 돈으로 충성하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고 말입니다. 현재 북한의 백만장자들인 그들은 당과 군의 주요 회사에서 사장, 혹은 간부직에 근무하면서 북한의 수출과 수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인맥을 이용하여 북한의 시장가격을 조종하고 있으며 심지어 달러의 힘으로 저들의 이권과 관련한 국가 정책까지 주무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들을 통해 알 수 있듯 북한 특권층 자녀들부터 김정일 정권을 더 이상 자기들의 미래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현재의 가치로 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김정일 정권은 화폐교환으로 시장가치를 새롭게 제정하고 시장인력을 기관인력으로 회수해 보려고 하지만 이미 북한에서 달러의 권력은 김정일의 권력을 초월했습니다. 더구나 수입 대 소비라는 불균형 경제 구조 때문에 시장을 차단한다는 것은 곧 중국 상인들을 압박하는 것이기에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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