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심화조사건의 실제 주역은 김정일과 장성택

장진성∙탈북 작가
2011.05.24
military_first_nk-305.jpg 지난해 8월 평양 당창건기념탑광장에서 열린 '선군혁명 영도' 개시 50주년을 경축하는 노동계급과 직원동맹원들의 모임.
사진-연합뉴스 제공
'혁명의 붉은 꽃이 만발해가네'라는 북조선의 유명한 혁명가요가 있습니다. 혁명선배들이 뿌린 붉은 선혈이 오늘은 승리의 꽃으로 온 나라에 활짝 피었다는 내용인데요. 이 노래처럼 과연 대를 이은 혁명이 북조선 전체 인민들의 이익에 맞게 계승되고, 또 그것이 증명 되었을까요? 오늘 이 시간에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치게 했다는 심화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전달하겠습니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공식 강연 자료들에 의하면 심화조 사건은 당시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의 개별적 야심에 의해 빚어진 정치적 비극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그러나 심화조사건은 김일성 사망 이후 식량난까지 겹치며 극도로 불안해진 정세를 이념전쟁으로 돌파하려 했던 김정일의 조작극이었습니다. 때문에 김정일은 심화조사건의 전주곡으로 제일 먼저 서관히 간첩사건을 만들게 됩니다. 서관히가 심화조의 첫 희생물로 선택된 이유는 중앙당농업비서를 간첩으로 몰아야 주체농법의 실패 책임을 김정일 정권이 아닌 남조선 정부로 떠넘길 수 있었고, 또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관히가 정말 정치목적을 가진 간첩이었다면 당 강연 자료에서 언급한대로 비서권한을 남용해서 비료 30t을 친인척들에게 빼돌리는 그런 경제범죄를 저질렀겠습니까? 서관히가 평양시민들 앞에서 공개 처형된 후 김정일은 장성택을 불러 안기부간첩사건을 좀 더 확대하라고 지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용성간첩사건”입니다.

조선중앙TV는 ‘최고사령부’를 타격하기 위해 6·25전쟁부터 현재까지 잠복해 있던 간첩들을 대거 적발했다는 내용의 이른바 ‘용성 간첩사건’을 구체적 으로 방영했습니다. 그리고 서관히 사건 연장선에서 용성간첩사건을 부각시키기 위해 중앙당 전 농업부장 김만금은 1984년에 이미 죽었는데도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던 유골까지 다시 파헤쳐 공개재판을 한 후 사격을 하는 부관참시를 했습니다. 김일성의 오랜 동지였던 피창협 마저도 역시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은 자살하고 말았죠. 김정일은 용성사건을 계기로 사회 안전성에 모든 공민의 주민등록 문건 요해사업을 심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했고, 이어 “내 주민등록 문건부터 요해하라”는 말로 사회 안전성에 최고의 수사특권을 주었습니다, 이렇듯 전국조직을 갖추고 태어난 심화조의 정치 책임자는 사회 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대장이 아니라 사회 안전성까지 관장하는 당조직부 행정담당 부부장 장성택이었습니다.

장성택은 심화조 권력을 쥐자 곧바로 중앙당본부당책임비서인 문성술부터 간첩혐의로 체포하도록 했습니다. 본부당 책임비서라면 노동당 주도의 북조선에선 당연히 김일성, 김정일 다음가는 권력가였는데도 말입니다. 문성술은 안기부 간첩이 아니라 장성택의 오랜 적수였습니다. 그는 본부당 책임비서로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와 김정일 계승문제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친인척들 중에서 권력지향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성택을 평시 ‘곁가지로 철저히 감시, 견제했었던 것이죠.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 서윤석이도 역시 장성택과 마찬가지로 채문덕 개인의 보복에 의해 간첩으로 몰린 인물입니다. 채문덕이 평양시 안전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평양 시 당 책임비서였던 서윤석에 의해 혁명화처벌 조치 됐던 그 악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남조선과 억지로 연결시켜 간첩을 만들자니 심화조는 6.25경력을 추적한다는 비과학적인 수사방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것을 기회로 지휘본부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피의 복수극을 벌렸습니다.

더욱이 그동안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보위사령부에 이어 감찰권력 최하위로 밀려났던 사회 안전성은 권력 한을 풀기 위해 노동당원들과 간부들을 상대로 온갖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공개 처형될 때마다 채문덕은 장성택을 걸쳐 김정일의 친필비준을 받아냈으며, 김정일은 김정일대로 중앙권력에 분포돼 있는 주요 불만 세력인 김일성의 오랜 동지들을 제거하는데 심화조를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결국 3대 멸족제도라는 악법까지 더해 본인은 물론 그 가족친척, 심지어는 친구들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등 심화조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1997년부터 2001년 사이에 2만 5천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 이후 당·군·내각 내의 권력지반 정돈과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심화조 사업이 본래의 의도를 넘어 전 사회적인 불안으로,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판단하고 2001년부터 다시 사회 안전성 해체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심화조 정치책임자였던 사회 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을 비롯한 지휘관들에게 장성택의 책임까지 떠넘겨 현대판 종파분자, 반혁명분자로 공개 총살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심화조 세포조직을 책임졌던 각 도·시·군 안전부장과 정치부장은 물론, 심화조 소속 안전원 6000명에게 무거운 형벌을 언도하거나 철직, 추방하게 됩니다. 또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2001년 사회 안전성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인민보안성으로 개편하도록 합니다.

한편 북한의 당 선전선동부는 그때부터 김정일의 정치를 ‘사랑의 정치, 믿음의 정치’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는데 이는 김정일이 심화조와 전혀 상관없음을 인민들에게 세뇌시키려는 비열한 기만선전이었던 것입니다. “혁명의 붉은 꽃이 만발하네” 심화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그 충신들도 분명 목청껏 불렀을 이 노래, 과연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면 자기들이 흘린 붉은 피가 혁명의 붉은 꽃으로 만발하게 피었다고 계속 노래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장진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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