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8월 종파사건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1-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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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6월 소련 방문 당시 TV대담 중인 김일성.
1956년 6월 소련 방문 당시 TV대담 중인 김일성.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의 김일성이 48년 동안 집권하고 있을 때는 물론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북한 내부에서 김일성의 권력에 대한도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김일성이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던 것은 아닙니다. 김일성은 집권초기 자신의 정적들로 부터 개인숭배와 독재정치에 대한 전면도전을 받기도했습니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입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8월 종파사건’에 대해 살펴봅니다.

1956년에 벌어진 8월 종파사건은 전쟁 후 북한이 권력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전후 복구와 개인숭배 문제를 놓고 김일성에게 도전장을 던진 권력투쟁이었습니다. 북한전략센터 김광인 소장의 얘깁니다.

김광인: 북한에서 가장 큰 권력투쟁으로 알려진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 개인에게는 정치적으로 가장 큰 위기였지만, 오히려 이를 계기로 반대세력을 축출하고 나아가 김일성 일인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 종파사건은 반 김일성 세력이 목숨을 내놓고 벌인, 북한 역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김일성 독제 반대 운동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물어 자신의 정적이었던 소련파 허가이와 남로당의 박헌영을 숙청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북한 노동당 내에는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 등 김일성의 경쟁자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전쟁복구와 김일성의 개인숭배 그리고 농업 집단화 문제 등 여러 정책을 두고 김일성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1956년 6월, 김일성은 북한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이 추진할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대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이를 틈타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은 김일성을 권좌에서 밀어내려는 비밀스러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들을 부추긴 배후 세력은 다름이 아닌 북한주재 소련대사 이바노프였습니다. 이바노프대사는 당시 북한의 부수상 겸 재무상이었던 최창익을 설득해 김일성을 합법적 끌어내려 노동당 내 권력을 분산 시킬 것을 제안 했습니다. 광복이후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운 소련이 이처럼 김일성을 끌어내리려 했던 이유는 전후 복구건설과 농업 집단화 정책 등에서 김일성이 소련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 소련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이 죽고 소련의 서기장으로 선출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해서 당시 공산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습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당시 스탈린과 깊은 친분이 있었던 모택동의 분노를 사 중-소 분쟁의 원인으로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소련에서 일어난 이러한 과감한 변화들은 북한 내에서 김일성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소련파와 연안파로 구축된 반 김일성 세력은 김일성이 50일간 자리를 비운동안 결집해 그가 귀국한 직후 열린 전원 회에서 김일성의 독재와 개인숭배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박금철과 김도만 등 김일성 추종 세력들은 연안파를 반당, 반혁명 종파주의자로 몰아 붙였고, 연안파가 궁지에 몰리자 그들과 동조하기로 했던 소련파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최창익과 박창옥 등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은 당직을 박탈당하고 또 이들과 연류 된 사람들은 모두 정부 직위에서 쫓겨났습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김광진 객원연구원의 말입니다.

김광진: 종파로 낙인 되면 결국은 가장 심하면 죽게 되는 것이다. 총살당하고 정치범 수용소로 가고. 가족까지 전부다.

김일성의 이러한 폭정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중국과 소련은 펑더화이 국방부장과 미코얀 부수상을 각각 평양에 파견해 김일성에게 8월 전원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취소하고 최창익과 박창옥 등 종파사건 관련자들을 중앙위원으로 복권시키라고 압박했습니다. 김일성으로서는 굴욕적인 조치였지만 중국과 소련의 요구를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이었습니다. 펑더화이와 미코얀이 평양을 떠나자 김일성은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대대적인 역습에 나섰습니다.

김일성은 전원회의 문헌학습을 조직해 ‘반당, 반혁명, 사대주의 죄행’을 규탄하고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김일성은 1957년 내내 자신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연안파와 소련파들의 대부분을 쫓아냈습니다. 중국과 소련도 더 이상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1956년 10월 헝가리 사태로 국제 공산주의 진영에는 분열이 생겼고 또 이듬해인 1957년 중국에서는 정풍운동이 시작되고 중-소 분쟁이 표면화 돼 두 나라는 북한 내정에 더 이상 간섭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거침없이 반대세력을 내몰아 1958년 3월 제1회 당 대표자 회의에서 조선노동당에서 종파가 완전히 청산됐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종연구소 정성장 박사의 말입니다.

정성장: 김일성에 대한 찬양은 1956년 8월에 벌어진 종파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국면에 이르게 된다..

8월 종파사건은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고 또 김 씨 일가의 유일지도체계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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