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일성의 줄타기 외교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11.16
평안북도에 있는 묘향산 입구에는 지난 1978년 세워진 국제친선전람관이 서 있습니다. 6층으로 된 호화건물 안에는 1945년부터 최근까지 김일성과 김정일이 외국 인사로 부터 받은 선물 22만 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부는 이 전시물을 이용해 김일성 부자의 외교력 선전하고 북한 주민들에게 김 씨 부자의 국제적 위상을 인식 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김일성의 외교활동을 살펴봅니다.

과거 냉전시절 소련과 중국은 김일성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동맹국이었습니다. 소련은 북한을 일본으로부터 해방하고 북한에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정권을 세운 나라이며 중국은 한국전 당시 미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부터 붕괴 직전의 북한을 구원한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과 중국만큼 북한에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집권 초기 중국과 소련을 갈아타는 줄타기 외교를 펼쳐 왔습니다. 남한 세종연구소 정성장 박사는 김일성의 복잡한 친러시아, 친중국 외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성장
: 북한은 정권수립 이후 계속 친소외교를 펼쳐왔다. 그러다가 6.25전쟁이후 소련보다는 중국으로부터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받고 그 때부터 등거리 외교를 서서히 모색했다. 그 이후 1953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서서히 북한이 친중 쪽으로 가게 된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였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한 것에 대해 김일성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렇게 소련과 중국을 오가며 줄타기 외교를 벌이는 김일성의 모습이 두 나라에게 곱게 비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국과 대립하던 중국과 소련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내 칠 수는 없었던 상황이라고 정상장 박사는 설명합니다.

정성장: 중국이나 소련 모두 냉전시대 미국과 적대적 관계였기 때문에 북한에 있어 다소 마음이 안 드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큰 틀에서는 협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발전 방향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심해지고 분쟁이 일어나자 김일성의 입장은 점점 더 곤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분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북한을 소련과 중국과 같은 대국을 섬기지 않고 독립적인 자세를 보이는 제3세계의 길을 가기로 결심합니다.

김일성은 이를 위해 또 한 번의 변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회 대회를 계기로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버렸던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다시 친분을 쌓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정성장: 동구권의 대부분 국가들이 탈 스탈린 화 의 길로 가고 있을 때 북한은 스탈린주의적 노선을 고집하면서 당시 북한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루마니아와 알바니아 이외에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예로 김일성은 그동안 수정주의 국가로 비방해 오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비동맹운동에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친분을 쌓기 위해 티토를 '블럭 불가담 운동'의 선구자라며 추켜올렸습니다. 정성장 박사의 말입니다.

정성장: 북한은 초기만 하더라도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북한이 친소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었을 때 유고를 분리주의 수정주이라고 비판했다. 북한이 60년대 중반부터 비동맹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유고와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유고는 노동자 자체관리 입장 등 스탈린주의적 입장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갔다. 노선 상으로는 북한과 큰 차이가 있었다.

당시 유고의 티토 대통령은 스탈린식 공산주의 체제를 거부하고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 공산주의 노선을 택해 서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여론으로 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김일성이 아무리 티토대통령과 친분을 쌓으려 해도 스탈린식 독제 정치를 추구하는 김일성과 티토 대통령을 동등한 인격자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동유럽 국가 지도자들 중에서는 김일성 식 사회주의를 동경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세스쿠였습니다. 루마니아 출신 방송인 그레그 스칼라티우 씨는 차우세스쿠가 김일성의 통치방법에서 가장 매력을 느꼈던 것은 김일성에 대한 개인 숭배였다고 말합니다.

스칼라티우: 차우세스쿠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식 독재자 개인숭배에 첫눈에 반했다. 차우세스쿠는 제3세계를 많이 방문했지만 북한처럼 커다란 행사를 해 줄 수 있었던 나라가 없었다. 북한식 공산주의, 북한식 독제체제를 루마니아에 설립하려했다.

차우세스쿠는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까지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북한식 공산주의를 배워가 루마니아 국민들에 대한 탄압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말 동구권 사회주의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차우세스쿠는 국민들의 재판을 받아 총살당하는 종말을 맞았습니다. 김일성의 통치스타일을 동경하는 지도자는 차우세스쿠 뿐만이 아니였습니다. 정성장 박사의 말입니다.

정상장
: 아프리카의 가난한 빈국 중에서는 북한 모델을 보면서 본받아야 한다는 국가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이 북한에 대해서 환상을 가졌던 부분도 있고...

그러나 김일성에 대한 환상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김일성 식 사회주의가 북한의 경제를 몰락시키고 북한주민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자. 비동맹 국가들은 김일성 식 사회주의의 한계를 목격하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제적 위치가 대폭 향상되면서 구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 아프리카 비동맹 국가들도 앞 다퉈 남한과 국교를 맺자 북한의 외교적 위상은 실추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에게 있어 가장 충격적인 것은 북한의 영원한 혈맹이라고 생각했던 중국과 러시아가 남한과 국교를 맺은 것입니다.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의 외교력은 더욱더 약화 됐습니다.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의 수많은 전시품들이 무색할 정도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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