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달현의 비극을 통해 본 북한의 운명

장진성∙탈북 작가
201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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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탈북자 장진성 씨가 전하는 김 씨 일가의 실체, 노동당 통일 전선부 대남 정책과 연락소 부원이었고 김정일을 두 차례나 접견한 일급작가 이었던 장진성 씨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60년 독재 체제와 현대판 봉건 세습에 대한 진실과 배경을 밝힙니다.

오늘날 북한은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는 구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시장이 붕괴되고, 둘째는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나라들의 국제봉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주체의 나라로 자부하면서정작 국정운영의 모든 책임은 외부로 돌린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북한의 경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그 원인에 대해 김달현 부총리의 비극을 통해 들여다보겠습니다. 김달현은 김일성의 외가 오촌 조카인 강관숙의 남편입니다. 현재 김정일의 최측근들 중 한명인 당 대외연락부장 강관주는 강관숙의 오빠입니다. 김정일은 그 남매와 특별히 가까웠는데 그 이유는 김정일이 어렸을 때 계모가 싫어 집을 뛰쳐나오면 외가친척인 강씨 집이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강관주 남매에 대한 애정으로 김달현에 대해서도 김정일은 처음엔 신임과 기대가 컸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경제 관료로 부각되면서부터 김정일과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일성은 간부들 앞에서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김달현이만큼 유능한 경제일꾼은 없다. 그는 경제뿐 아니라 외교에도 능하고, 특히 수학천재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큰 연합기업소는 물론 작은 지방공장 형편까지 다 기억돼 있다. 그에게만 물어보면 나는 언제든 우리나라의 공장들이 어디서,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는지 알 수가 있다.”실제로 김일성은 현지시찰 때마다 중요 결심을 말하기 전엔 반드시 김달현에게 물어보곤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김일성의 행동들은 김정일을 매우 불쾌하게 했습니다. 측근들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됐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89평양축제 준비를 위해 김일성이 간부들과 함께 광복거리, 통일거리건설 전망 관을 둘러 볼 때였습니다. 김정일이 금강산, 묘향산, 등 여러 관광지역의 도시건설도 추가하겠다는 발언을 하자 김일성은 김달현에게 가능하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김달현은 그것이 오히려 자재와 설비의 분산을 초래하고, 더욱이 평양의 대도시 건설을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하자면 전국의 기술자들과 기능공들을 평양으로 불러 모아야 가능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김정일의 제안은 무시되고, 김일성은 김달현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렇듯 김일성이 김달현을 더욱 신임하게 된 이유는 너무 비대해진 김정일의 당 조직비서 권력에 대응하자면 당과 경제를 분리시키는 전략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경제전문가들을 내세우고 힘을 실어줄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정무원이 이미 당조직부 하위기관으로 전락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권력질서와 상관없이 김일성은 수령신격화를 이용한 현지시찰로 경제 분야에서의 지도력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김일성이 한평생 말했다는 이밥에 고깃국 이야기도 바로 현지시찰강행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현지시찰 과정에서 즉흥적인 발언들을 쏟아낼 때마다 유관 부서들은 수령의 교시와 당조직부의 지침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그래서 고령의 나이에 이제는 편히 쉬라는 김정일과, 현지시찰을 막지 말라는 김일성과의 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결국 김일성의 현지시찰 권력에 밀려 김정일의 경제 권력은 당38호실, 39호실로 제한됐고, 그것이 당경제가 내각경제를 압도하게 된 출발점으로도 작용했습니다.

사실 김일성과 김정일과의 대립은 정치성향의 대립이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때론 자신의 과오도 인정할 줄 알았던 반면, 세습정치를 위해 수령신격화를 만든 김정일은 항상 완벽성을 추구했습니다. 때문에 경제 이념의 문제에서도 김 씨 부자는 서로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졌습니다.

1980년대 말 김일성은 88서울올림픽에 자극을 받아 인민경제대학 경제박사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을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전향적 조치의 배경에는 정무원 부총리이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인 김달현이 있었습니다. 김달현은 김일성에게 대안의 사업체계는 일개 기업소의 행정에는 기여할지 모르나 국가경제 운영체제로서는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이견에 동감한 김일성은 사회주의 동구권 나라들 중 가장 선진국이면서도 같은 분단국가인 동독 경제를 연구하도록 경제시찰단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 동구권 붕괴로 국가경제 운영과 관련한 당 비상대책회의가 열렸을 때는 김달현 주도의 중국식 개혁개방 논의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때에도 김일성은 김정일의 거듭된 반대를 뿌리치고, 김달현의 손을 들어주어 1992년 김달현을 단장으로 하는 경제 고찰 단을 서울에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김달현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김정일은 3차 7개년계획 실패 책임을 김달현에게 뒤집어 씌워 1993년 끝끝내 그를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임하기에 이룹니다.

김일성 사후에는 당의 자력갱생 노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부총리 직에서 해임시켜 함흥 2.8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강등시켜 지방으로 추방했습니다. 그 죄명의 근거란 이러했습니다. 식량난과 함께 극심한 전기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6년부터 북한은 전국 도, 시, 군, 심지어 직장들에도 자체기술과 자재로 중소형 발전소를 건설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이 자강도 정신, 자력갱생정신이라고 주장하는 그 중소형발전소정책의 발기자는 다름 아닌 연형묵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달현은 기술과 경험이 축적된 전문공장에서 생산과 공급의 균형을 추구해야지 지방, 단위들에서 산발적으로 중소형발전소를 만들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엄청난 낭비이고 비효율적이라고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외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차관형태로 들여와 전력난을 해결하는 것이 더 싸다고 발언했는데, 그것이 수정주의, 반당, 반사회주의 행위로 몰려 해임 조치됐던 것입니다. 김정일의 보복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김달현이 2.8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내려간 후 생산부실과 기업소 간부들의 부정부패를 문제 삼아 국가 검열 단을 내려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김달현은 자신과 평시 앙숙관계였던 연형묵이 검열 단 단장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무실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훗날 현지시찰 과정에서 시커멓게 녹이 쓴 중소형발전소를 본 김정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김달현이가 옳았다. 지금 전국에 수 천, 수 만개의 중소형 발전소들이 만들어졌는데 과연 돌아가는 곳이 몇 군데나 있는가?” 만약 김정일이 김달현, 그 한사람의 능력이라도 허심하게 인정하고, 아낄 줄 알았다면 북한이 오늘처럼 이 지경까진 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장진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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