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한국전의 원흉 김일성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10.12
2010.10.12
사진-연합뉴스 제공
올해는 한국전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지 수 십년이 지나도록 북한은 전쟁의 책임을 남쪽에 돌려왔지만 이제는 북한이 전쟁의 책임을 모면할 수 없게 됐습니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개된 외교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으로 인해 한국전의 책임이 전적으로 김일성에게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김 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오늘은 한국전의 원흉 김일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해방이후 북한에 입국한 김일성은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1949년 6월 30일 김일성은 북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그 회의에서 조선 로동당 위원장 자리에 앉게 됩니다. 북한의 정권을 거머쥔 김일성은 1949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남한을 침략할 계획을 구체화 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든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9월 24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김일성에게 지시문을 보내 북조선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소련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남침야욕을 꺾지 않았습니다.
1950년 1월 17일 남로당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도 김일성은 소련군정 사령관 스티코프에 소련이 남침을 허락할 것으로 촉구하면서 스탈린과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선제공격을 할 경우 이것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중국혁명이 끝난 다음에는 남한을 해방 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에는 우수한 군대가 있다며 스탈린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등용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남침 명분은 조국해방이었지만 그의 권력에 대한 야욕도 배재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김일성을 연구해온 하와이 주립대학교의 서대숙 전 석좌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한국에서만 몰랐지 전쟁준비는 김일성이 오랫동안 했다. 세상에 알려지기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전쟁을 하라고 해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김일성이 전쟁을 하겠다고 졸랐다. 스탈린은 상당히 오랫동안 김일성을 말렸다.
김일성은 무려 48번이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해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들과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자서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내용들입니다.
결국 스탈린은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고 말았습니다. 서대숙 교수는 스탈린이 남침을 허락한 것에는 다른 정치적 요인도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서대숙: 딘 에치슨의 평화선 때문이다. 딘 에치슨은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는데 당시 미국의 국방 한계선이 한국을 포함하지 않고 일본만 국방 방위선에 포함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남한을 침략해도 되겠다고 판단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들과 흐루쇼프 전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지원은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군조종사들과 교관 등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대신 김일성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았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소련의 남침 승인과 중공의 대규모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을 일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승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지만 UN군의 반격으로 10월 12일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철수 하게 됩니다.
한편 김일성은 남침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허가이와 박헌영 등 다른 공산주의 경쟁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서대숙: 박헌영은 한국전을 벌이는 것에 대 찬성했다. 허가이는 소련에서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하라고 하면하고. 말라고 하면 안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패전의 책임을 자신의 정적들에게 돌려 이들을 모두 처형합니다.
서대숙: 박헌영을 숙청할 때 “박헌영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김일성이 말한다. 한국전쟁을 논의 할 때 공화국 인민군이 남한 인민들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없애 버리고 공산 혁명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낙동강 까지 내려갔어도 남한 인민들이 봉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오늘날 까지도 전쟁의 책임이 남쪽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북한이 남쪽을 침략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고 서대숙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불란서 통신 기자가 6.25가 터진 직후 김일성과 인터뷰 한 것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김일성은 “우리가 우리 조국과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쳐내려 가는데 누가 우리더러 침략을 했다고 하겠느냐” 라고 말했다. 그 얘기는 우리가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승리하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라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은 한국전을 통해 북쪽에 있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와 많은 재산피해를 입었고 전쟁이산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 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오늘은 한국전의 원흉 김일성에 대해 살펴봅니다.
해방이후 북한에 입국한 김일성은 소련의 도움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1949년 6월 30일 김일성은 북남조선로동당 중앙위원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그 회의에서 조선 로동당 위원장 자리에 앉게 됩니다. 북한의 정권을 거머쥔 김일성은 1949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남한을 침략할 계획을 구체화 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만든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1949년 9월 24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김일성에게 지시문을 보내 북조선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소련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자신의 남침야욕을 꺾지 않았습니다.
1950년 1월 17일 남로당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도 김일성은 소련군정 사령관 스티코프에 소련이 남침을 허락할 것으로 촉구하면서 스탈린과 면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선제공격을 할 경우 이것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중국혁명이 끝난 다음에는 남한을 해방 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에는 우수한 군대가 있다며 스탈린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이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등용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남침 명분은 조국해방이었지만 그의 권력에 대한 야욕도 배재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김일성을 연구해온 하와이 주립대학교의 서대숙 전 석좌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한국에서만 몰랐지 전쟁준비는 김일성이 오랫동안 했다. 세상에 알려지기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전쟁을 하라고 해서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김일성이 전쟁을 하겠다고 졸랐다. 스탈린은 상당히 오랫동안 김일성을 말렸다.
김일성은 무려 48번이나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해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들과 흐루쇼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자서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내용들입니다.
결국 스탈린은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하고 말았습니다. 서대숙 교수는 스탈린이 남침을 허락한 것에는 다른 정치적 요인도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서대숙: 딘 에치슨의 평화선 때문이다. 딘 에치슨은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는데 당시 미국의 국방 한계선이 한국을 포함하지 않고 일본만 국방 방위선에 포함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남한을 침략해도 되겠다고 판단하고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공개된 외교문서들과 흐루쇼프 전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지원은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군조종사들과 교관 등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대신 김일성은 중국으로부터 대규모 군사지원을 받았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소련의 남침 승인과 중공의 대규모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을 일방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중국과 소련의 도움으로 승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김일성은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지만 UN군의 반격으로 10월 12일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철수 하게 됩니다.
한편 김일성은 남침 계획을 세우는데 있어 허가이와 박헌영 등 다른 공산주의 경쟁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서대숙: 박헌영은 한국전을 벌이는 것에 대 찬성했다. 허가이는 소련에서 나온 사람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하라고 하면하고. 말라고 하면 안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패전의 책임을 자신의 정적들에게 돌려 이들을 모두 처형합니다.
서대숙: 박헌영을 숙청할 때 “박헌영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김일성이 말한다. 한국전쟁을 논의 할 때 공화국 인민군이 남한 인민들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없애 버리고 공산 혁명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낙동강 까지 내려갔어도 남한 인민들이 봉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오늘날 까지도 전쟁의 책임이 남쪽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김일성은 한국전쟁이 북한이 남쪽을 침략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고 서대숙 교수는 말합니다.
서대숙: 불란서 통신 기자가 6.25가 터진 직후 김일성과 인터뷰 한 것이 있다. 그 인터뷰에서 김일성은 “우리가 우리 조국과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쳐내려 가는데 누가 우리더러 침략을 했다고 하겠느냐” 라고 말했다. 그 얘기는 우리가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승리하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라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은 한국전을 통해 북쪽에 있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와 많은 재산피해를 입었고 전쟁이산가족들의 고통과 슬픔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