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루마니아를 파탄시킨 김일성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11.23
한국 속담에 ‘개를 따라가면 뒷간으로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어울리면 손해를 본다는 말입니다. 북한이 호황을 누리던 60년대 말, 몇몇 동구권 지도자들은 김일성의 개인숭배주의를 동경했습니다. 특히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세스쿠는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어가며 루마니아에 북한식 공산주의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오늘은 루마니아를 암흑으로 몰아넣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대해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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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22일 루마니아 시민들이 니콜라스 차우셰스쿠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AFP PHOTO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는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물이 서있습니다. 지금은 루마니아 의회 궁 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궁을 보고 이보다 더 화려한 인민 궁전을 짓기 위해 1984년 착공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차우세스쿠는 이 건물이 완성되면 김일성처럼 발코니에 서서 자신을 환호하는 인민들 앞에서 손을 흔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우세스쿠는 건물이 완공되기도 전에 국민들의 재판을 받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비록 국민들의 심판으로 처형당한 차우세스쿠이지만 한때 그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191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차우세스쿠는 어려운 형편으로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해 수도 부쿠레슈티로 올라갔습니다. 가난이 원망스럽던 그는 젊은 청소년기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앞장서면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빠른 속도로 루마니아 공산당 서열에 올라온 차우세스쿠는 1965년 루마니아 최고의 실권자 교오르게 데지의 사망으로 47살의 나이에 루마니아 공산당의 최고 자리인 당 서기장을 맡게 됩니다.

집권한 후 몇 년 동안 그는 뛰어난 외교력으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루마니아 방문을 성사 시키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루마니아를 통치해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는 또 세계 방방 곳곳을 누비며 많은 국가들과 교류 협력을 맺고 수많은 훈장과 명예박사 학위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1971년 김일성을 만난 차우세스쿠는 존경받는 지도자에서 악독한 독재자로 변신합니다. 루마니아 출신 방송인 그레그 스칼라티우 씨의 말입니다.

<차우세스쿠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식 독재자 개인숭배에 첫눈에 반했다. 차우세스쿠는 제3세계를 많이 방문했지만 북한처럼 커다란 행사를 해 줄 수 있었던 나라가 없었다. 북한식 공산주의, 북한식 독제체제를 루마니아에 설립하려했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차우세스쿠는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으로 떠받드는 북한식 독재주의를 루마니에 사람들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북한의 붉은 소년단을 본 따 루마니아 붉은 소년단을 만들고 북한의 집단체조를 모방해 루마니아 식 집단 체조를 만드는가 하면 김일성 처럼 모든 국가행사에 국민들을 강제동원 시키는 등 그의 독재와 탄압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습니다. 스칼라티우 씨의 말입니다.

<인권 탄압이 상당히 심했다. 반 체재 인사들은 구속되고, 감시당하고. 사실 탄압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다른 동구권 나라보다는 반 체재 인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감시당하고 구속당했다. 루마니아 국민들은 표현의 자유가 전혀 없었고, 모여서 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우세스쿠는 또 북한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주듯 아들인 니쿠에게 세습을 시도하고 또 1974년에는 루마니아 헌법에도 없는 대통령 직을 만들어 그 자리에 자신이 취임해 절대적인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는 또 셰쿠리타트라는 친위조직을 만들어 국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는데 당시 루마니아 전역에는 약 3백 만 개가 넘는 도청기가 설치되어 국민들의 모든 움직임을 빈틈없이 감시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차우세스쿠의 국민들에 대한 탄압은 김일성 주석궁을 본 딴 호화판 인민궁전을 지으며 절정에 달합니다. 차우세스쿠는 국민들의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방이 1,100개나 되는 거대한 인민 궁전을 짓기 위해 부쿠레슈티 중심부의 4분의 1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이 곳에 살던 주민 7만 여명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웅장한 도로와 커다란 건물과 수 십 만 명의 관중들이 모여 독재자를 숭배할 수 있는 대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 옛날 부쿠레슈티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평양에 있는 건물과 같은 큰 건물을 많이 지었다. 그러한 건물들을 짓기 위해 외국에서 돈을 많이 빌렸고 외채가 많았기 때문에 루마니아 경제도 어려움에 빠졌다.>

국민들의 피눈물에 젖은 이 궁전이 완공되기도 전 루마니아 국민들은 차우세스쿠 독재에 대한 불만을 폭발했습니다.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의 자유화 물결을 타고 루마니아 국민들도 민주화 시위에 가담했습니다. 1989년 12월 22일 루마니아의 민중봉기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차우세스쿠 부부는 공산당 본부 건물에서 헬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게 됩니다. 차우세스쿠 부부는 당시 자신이 그토록 본받고 싶어 했던 김일성이 있는 북한으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결국 차우세스쿠는 군중들에게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의 독재가 종식 된지 20년이 지난 지금, 부쿠레슈티 중심부에 서 있는 의회 궁은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차우세스쿠 독재 시절 쓰라린 추억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루마니아 국민들은 김일성에게 배워온 공산주의가 자신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생각보다는 아직까지도 독재정권에서 핍박받고 있을 북한주민을 동정하는 입장이라고 스칼라티우 씨는 말합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북한의 현 상황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루마니아가 1989년 공산주의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지금 북한과 비슷한 나라가 돼있을 것이다.>

김 씨 일가의 실체 이번 주 순서를 마칩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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