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정일이 신찬호를 죽인 이유
장진성∙탈북 작가
2011.11.16
2011.11.16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은 중앙당 신소처리부 부장이었던 신찬호에 대해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찬호는 1990년대 중반까지 당조직부 신소처리부 부장으로 있으며 김정일 유일지도체제 구축을 위한 제1선에서 맹활약했던 사람입니다. 김정일은 한 때 신찬호를 ‘나의 오른팔’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찬호가 김정일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신소들을 김일성에게 숨기고 당조직부로 은밀히 집중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일부 당 간부들이나 지방에서 익명으로 김일성에게 제기한 신소들에 한해서는 그 출처를 추적하여 보복 응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듯 이름만 신소처리부서일 뿐, 신소말살 부서장이었던 신찬호에 의해서 김일성은 북한의 현실은 물론, 당 간부들과도 완전히 격리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신찬호의 신소처리부장 권력은 당조직부 내에서도 핵심권력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38호실 자금을 횡령한 사건이 드러나면서 신찬호는 1990년대 중반 혁명화를 가게 됩니다.
아마 북한 당 간부들치고 혁명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혁명화란 단순히 책임추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간부들의 필수 경력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당근만 주는 것이 아니라 채찍도 가해 간부들에게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알도록 유도하는 김정일의 통치술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렇듯 가끔 권력의 강제성을 보여줌으로서 김정일은 자기 권력의 절대성을 부각하는 한편, 최측근들의 권력야심을 아예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입니다.
김정일의 최측근들이었던 김용순, 계응태, 최룡해, 심지어는 이제강 당조직부 제1부부장도 역시 혁명화 단계를 거친 인물들입니다. 그런 간부 혁명화에도 부류가 있습니다.
가장 경미한 혁명화는 일시적 해임조치와 함께 당 학교에 보내는 교육 혁명화입니다.
경우에 따라 혁명화 지역을 농장이나 공장으로 지정하는 노동혁명화가 있고 가장 최고의 처벌은 새로운 혁명가로 다시 태어나도록 정신, 육체적 수양을 지독하게 강요하는 감금 혁명화입니다.
신찬호의 경우는 세 번째에 해당된 혁명화였습니다. 그가 신소처리 부장직에서 해임되어 내려간 혁명화 지역은 18호 관리소였습니다. 18호 관리소란 인민보안성이 운영하는 수용소인데, 장성택의 발기로 만들어졌습니다.
장성택은 극악한 상습범죄자들을 사회와 일정기간 격리시키기 위해서는 인민보안성도 국가보위부가 운영하는 정치범수용소 수준의 수용소가 필요하다며 김정일로부터 비준을 받아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리에 방대한 면적의 전기철조망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그 18호 관리소엔 상습 범죄자들과 함께 신찬호처럼 완전한 노예간부로 훈련 받는 혁명화 대상 간부들도 많았습니다. 18호 관리소에 수감 된지 며칠 안 되어 신찬호는 그 안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80년대까지 중국에서 살다 평양에 들어온 김영자라는 조선족 여성이었는데 신찬호가 경악했던 이유는 그 여성이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사촌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신찬호는 김정일의 친척이 어떻게 18호 관리소 죄인이 될 수 있냐며 항변했지만 18호 관리소측은 미쳐도 정치적으로 미친 여자라며 묵살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숙의 가계도와 그 이름들, 고향과 이주사연 등 김영자가 말하는 자료들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신찬호는 김정일에게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일개 수감자가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말 자체가 범죄였지만 신찬호는 확신했습니다.
오랫동안 당 조직부 신소처리부 부장으로 근무했던 그여서 김정일에게 은밀히 편지가 전달되자면 누구를 거쳐야 하고, 또 누구를 이용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18호 관리소 계호원 한 명을 포섭하여 휴대형 녹음기를 관리소로 들여온 다음 김영자에게 태어난 날부터 18호 관리소로 들어오게 된 경위까지 육성녹음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녹음기를 품고 신찬호가 알려준 주소대로 계호원은 휴가를 내어 평양으로 찾아갔고, 마침내 비공식 경로를 통해 김정일 책상 앞에까지 전달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자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김정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 여성을 사회와 격리시키라고 명령한 장본인이 바로 김정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 역사문헌연구소가 처음 취재해 왔던 김영자의 자료들이 그동안 주민들에게 선전했던 김정숙 일가의 혁명역사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선 김일성의 전처이며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조선의 3대 장군으로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진 김정숙은 함경남도 신파군에서 1917년 12월24일 가난한 빈농의 맏딸로 태어났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김영자가 증언한 김정숙의 본명은 김정자였고, 빈농이 아니라 부농의 집 맏딸이었으며 9살 때 이미 부모끼리 정략결혼을 시켜주었다는 것, 그 후 부잣집 첩으로 들어갔다가 가출하여 만주로 간 것이 항일무장의 계기가 됐다는 것, 그 외에도 김씨 신격화를 방해하는 진실의 증언들뿐이어서 김정일의 “미친년” 한마디에 그 여성은 졸지에 죄수복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때 김영자가 즉결처형이나 정치범수용소가 아닌 18호관리소에 수감될 수 있었던 것은 간부들도 김정일의 친척이 분명하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때 이미 다 처리된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느닷없이 육성녹음으로 다시 제 앞에 나타나자 광분하여 그녀를 포함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단 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김정일을 더 자극했던 것은 그 테이프를 서기실로 보내온 경로가 여동생 김경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경희는 가짜라도 좋으니 어머니의 친척이라는 그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야단쳤지만 김정일은 김영자를 수용소 폐인으로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처형을 서두르도록 했습니다. 하여 그 테이프 보고에 공헌한 김정일의 충신 아홉 명이 그날 밤중으로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18호 관리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독방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김영자, 신찬호, 그를 도와줬던 계호원과 함께 9명 전원이 말뚝에 묶인 채 사형당했습니다.
그 사건의 내막이 알려지게 된 것은 18호관리소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위부가 운영하는 정치범수용소와 달리 18호 관리소는 인민보안성 관리 수용소여서 보완이 허술했고, 또 거기에서 혁명화 복역을 끝내고 퇴소한 간부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김정일의 오른팔이라는 신찬호가 주역이었던 사건이어서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던 간부들의 귓속말과 입을 통해 더 자세히, 그리고 더 급속히 알려지게 됐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장진성이었습니다.
신찬호가 김정일의 최측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신소들을 김일성에게 숨기고 당조직부로 은밀히 집중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일부 당 간부들이나 지방에서 익명으로 김일성에게 제기한 신소들에 한해서는 그 출처를 추적하여 보복 응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듯 이름만 신소처리부서일 뿐, 신소말살 부서장이었던 신찬호에 의해서 김일성은 북한의 현실은 물론, 당 간부들과도 완전히 격리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신찬호의 신소처리부장 권력은 당조직부 내에서도 핵심권력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38호실 자금을 횡령한 사건이 드러나면서 신찬호는 1990년대 중반 혁명화를 가게 됩니다.
아마 북한 당 간부들치고 혁명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혁명화란 단순히 책임추궁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간부들의 필수 경력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당근만 주는 것이 아니라 채찍도 가해 간부들에게 무조건적인 순종만을 알도록 유도하는 김정일의 통치술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렇듯 가끔 권력의 강제성을 보여줌으로서 김정일은 자기 권력의 절대성을 부각하는 한편, 최측근들의 권력야심을 아예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입니다.
김정일의 최측근들이었던 김용순, 계응태, 최룡해, 심지어는 이제강 당조직부 제1부부장도 역시 혁명화 단계를 거친 인물들입니다. 그런 간부 혁명화에도 부류가 있습니다.
가장 경미한 혁명화는 일시적 해임조치와 함께 당 학교에 보내는 교육 혁명화입니다.
경우에 따라 혁명화 지역을 농장이나 공장으로 지정하는 노동혁명화가 있고 가장 최고의 처벌은 새로운 혁명가로 다시 태어나도록 정신, 육체적 수양을 지독하게 강요하는 감금 혁명화입니다.
신찬호의 경우는 세 번째에 해당된 혁명화였습니다. 그가 신소처리 부장직에서 해임되어 내려간 혁명화 지역은 18호 관리소였습니다. 18호 관리소란 인민보안성이 운영하는 수용소인데, 장성택의 발기로 만들어졌습니다.
장성택은 극악한 상습범죄자들을 사회와 일정기간 격리시키기 위해서는 인민보안성도 국가보위부가 운영하는 정치범수용소 수준의 수용소가 필요하다며 김정일로부터 비준을 받아 평안남도 북창군 득장리에 방대한 면적의 전기철조망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그 18호 관리소엔 상습 범죄자들과 함께 신찬호처럼 완전한 노예간부로 훈련 받는 혁명화 대상 간부들도 많았습니다. 18호 관리소에 수감 된지 며칠 안 되어 신찬호는 그 안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80년대까지 중국에서 살다 평양에 들어온 김영자라는 조선족 여성이었는데 신찬호가 경악했던 이유는 그 여성이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사촌동생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신찬호는 김정일의 친척이 어떻게 18호 관리소 죄인이 될 수 있냐며 항변했지만 18호 관리소측은 미쳐도 정치적으로 미친 여자라며 묵살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숙의 가계도와 그 이름들, 고향과 이주사연 등 김영자가 말하는 자료들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신찬호는 김정일에게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일개 수감자가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말 자체가 범죄였지만 신찬호는 확신했습니다.
오랫동안 당 조직부 신소처리부 부장으로 근무했던 그여서 김정일에게 은밀히 편지가 전달되자면 누구를 거쳐야 하고, 또 누구를 이용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18호 관리소 계호원 한 명을 포섭하여 휴대형 녹음기를 관리소로 들여온 다음 김영자에게 태어난 날부터 18호 관리소로 들어오게 된 경위까지 육성녹음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 녹음기를 품고 신찬호가 알려준 주소대로 계호원은 휴가를 내어 평양으로 찾아갔고, 마침내 비공식 경로를 통해 김정일 책상 앞에까지 전달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영자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김정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 여성을 사회와 격리시키라고 명령한 장본인이 바로 김정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 역사문헌연구소가 처음 취재해 왔던 김영자의 자료들이 그동안 주민들에게 선전했던 김정숙 일가의 혁명역사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선 김일성의 전처이며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조선의 3대 장군으로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진 김정숙은 함경남도 신파군에서 1917년 12월24일 가난한 빈농의 맏딸로 태어났다고 돼 있습니다.
그러나 김영자가 증언한 김정숙의 본명은 김정자였고, 빈농이 아니라 부농의 집 맏딸이었으며 9살 때 이미 부모끼리 정략결혼을 시켜주었다는 것, 그 후 부잣집 첩으로 들어갔다가 가출하여 만주로 간 것이 항일무장의 계기가 됐다는 것, 그 외에도 김씨 신격화를 방해하는 진실의 증언들뿐이어서 김정일의 “미친년” 한마디에 그 여성은 졸지에 죄수복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때 김영자가 즉결처형이나 정치범수용소가 아닌 18호관리소에 수감될 수 있었던 것은 간부들도 김정일의 친척이 분명하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때 이미 다 처리된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느닷없이 육성녹음으로 다시 제 앞에 나타나자 광분하여 그녀를 포함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단 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김정일을 더 자극했던 것은 그 테이프를 서기실로 보내온 경로가 여동생 김경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경희는 가짜라도 좋으니 어머니의 친척이라는 그 여성을 만나게 해달라고 야단쳤지만 김정일은 김영자를 수용소 폐인으로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처형을 서두르도록 했습니다. 하여 그 테이프 보고에 공헌한 김정일의 충신 아홉 명이 그날 밤중으로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18호 관리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독방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김영자, 신찬호, 그를 도와줬던 계호원과 함께 9명 전원이 말뚝에 묶인 채 사형당했습니다.
그 사건의 내막이 알려지게 된 것은 18호관리소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위부가 운영하는 정치범수용소와 달리 18호 관리소는 인민보안성 관리 수용소여서 보완이 허술했고, 또 거기에서 혁명화 복역을 끝내고 퇴소한 간부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김정일의 오른팔이라는 신찬호가 주역이었던 사건이어서 그의 근황을 궁금해했던 간부들의 귓속말과 입을 통해 더 자세히, 그리고 더 급속히 알려지게 됐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장진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