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부수상 박금철의 숙청(1)

김주원∙ 탈북자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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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박금철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박금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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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지난시간들에 북한에서 해방 후 김일성이 유일독재체제구축을 위하여 북한정부의 요직에 있던 고위관료들을 숙청한 데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겸 국가부수상, 내각부총리로 활약하다가 1967년에 처형된 박금철의 숙청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1956 8월 종파사건으로 국가검열상이었던 최창익, 상업상이었던 윤공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조선직업총동맹 위원장 서휘 등 중국 연안파 출신들과 국가계획위원장 박창옥, 건설상 김승화, 국가건설위원장 박의완 등 소련파들이 숙청되면서 김일성을 중심으로 빨치산파들과 갑산파들이 북한의 권력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빨치산파는 김일성과 함께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국경을 넘어 소련극동군 88특별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했던 사람들로 북한에서 항일빨치산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입니다. 갑산파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경에 김일성과 연계하여 국내에서 활동한 사람들로 대표적인 인물이 박달, 이제순, 마동희, 권영벽, 박금철 등입니다. 박금철이 갑산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갑산파를 갑산공작위원회 출신의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북한전문가들은 갑산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북한의 양강도에 갑산군이 하나의 군행정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실 갑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에 지금의 양강도에 해당하는 혜산시와 보천군, 삼지연군, 운흥군, 갑산군, 삼수군 일대를 갑산부로 정하면서 큰 면적을 포괄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 남북을 통틀어 해발고가 가장 높은 1000m에서 2000m의 고산지대여서 국내반일운동가들이 이곳에서 활동하기 유리하였습니다. 결국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하던 많은 애국자들이 이 갑산부 지역에 모이다보니 갑산공작위원회도 생겼고 지금은 이들을 갑산파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양강도가 없었고 갑산군이 함경북도에 속하여 있었는데 박금철은 1912년에 이곳 갑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박금철은 갑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반일애국활동에 가담하였습니다. 1930년대 갑산에서 항일지하운동을 하였습니다그는 박달과 함께 1936년에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명하고 이 반일애국활동을 조직, 지휘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1938년에 감산과 혜산, 중국 장백지방에서 739명의 많은 국내 반일애국투사들이 일제경찰에 검거되었는데 박금철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되면서 1945 8 16일에 석방되었습니다.

박금철은 1948년에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전쟁 중이었던 1952년에는 당중앙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승급하였고 그 후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출세하기도 하였습니다. 1956 8월 종파사건으로 중국연안파와 소련파들이 대거 숙청으로 제거되면서 1957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61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966 10월에는 조선로동당 정치위원 겸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로, 1967년에는 내각 부수상이라는 북한의 2인자 자리에 오른 박금철의 권력세도로 북한권력 안에서 갑산파의 위상은 비상히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26살이었던 김정일의 눈에는 박금철을 중심으로 세력이 커지는 갑산파의 행태가 곱게 보일리가 없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4 6월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을 거쳐 과장, 부부장 등을 거치면서 점차 후계자의 꿈이 커가던 김정일은 아버지의 권력승계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마지막 권력경쟁자로 남은, 그리고 자기의 후계세습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갑산파에 대한 숙청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정일 자신이 직접 김일성에게 박금철을 비롯한 갑산파의 반혁명적인 행위를 이야기하기도 하였고 빨치산투사들인 최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김일성을 자극하여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꾀하였습니다.

갑산파의 가장 큰 반혁명 음모죄는 김일성의 경제정책, 당의 경제노선에 대한 반항죄였습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후반에는 산업화를 위한 경제우선주의 노선을 제시하였지만 8월 종파사건이후에 소련과의 갈등을 빚으면서 국방산업에서 자위의 원칙을 고수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1962년부터는 국방과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제시하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북한은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이 침체되고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수정주의와 중국의 교조주의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반 문제들을 김일성은 당을 강화하고 당의 조직사상적 통일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문제해결의 열쇠를 찾으려 했지만 박금철은 일인 독재, 당의 독재보다 다원화와 동구라파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운영하는 경제방식인 경제분권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이들의 견해는 경제건설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같은 내용은 김일성이 1970년대 여러차례 언급하면서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김일성은 1979 7 6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21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며 혁명화하기 위한 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통하여 박금철을 비롯한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이 당의 노선과 정책대신에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당 간부들에게 필독문헌으로 읽게 했으며 ‘10개년 전망계획’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정주의를 퍼트리려고 했다고 강조한데서도 잘 드러났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박금철을 비롯한 갑산파들을 반당반혁명종파분자로 매장하려 했던 죄목은 경제건설에서 수정주의를 하려고 했던 것 외에,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인민들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하려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박금철은 일제강점기에 감옥에서 고생하던 자신을 변심없이 지켜준 부인을 주인공으로 형상화한 ‘일편단심’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이었던 김도만에게 창작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해방 전 부인이 형무소에 갇힌 자신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한 이 연극은 당시 항일빨치산 혁명전통 계승을 강조하였던 김일성과 그의 후계자 자리를 꿈꾸기 시작한 김정일에게 도전하는 행위로 밖에 달리 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김정일이 이에 대해 “누구를 위한 일편단심인가”라며 강하게 비판해 나섰던 것만 보아도 그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금철이 자기의 권세를 이용해 갑산파들을 비롯한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대거 중앙당과 내각의 요직들에 내정하도록 함으로써 노동당의 간부선발원칙도 무시하였다는 것도 숙청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봉한학설도 박금철의 숙청과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서울대 교수출신의 김봉한 교수의 ‘경락계통에 관한 연구’는 박금철이 득세해 있던 1950년대 말부터 1967년까지 이어져왔고 국내뿐아니라 국외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박금철이 이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던 것이 그가 숙청되면서 동시에 이 학설에 대한 연구도 중지되었던 것입니다.

경제건설에서 수정주의, 간부선발원칙을 지키지 않은 죄, 봉건유교사상의 주입과 혁명전통의 훼손 등 박금철의 숙청의 죄가에 대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장 이면에는 김일성의 유일독재지배를 위한 숙청정치와 김정일의 후계세습을 위한 교활한 음모가 숨겨져 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박금철의 숙청을 둘러싼 중국과 구소련의 움직임과 숙청 이후의 김일성의 유일독재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던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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