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종교-독일 천주교인들의 북한 수용소 생활

김주원∙ 탈북자
2019-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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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강지영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이 영상을 통해 한국그리스도교 신앙과직제협의회에 성탄축하와 평화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모습.
북한 강지영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이 영상을 통해 한국그리스도교 신앙과직제협의회에 성탄축하와 평화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우리나라에 미국과 캐나다, 호주, 독일 등 서방국가들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들어온 지도 2백여 년이 넘었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도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에 장대현교회와 칠골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숭실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원산과 함흥을 비롯한 북한 곳곳에 성당이 세워져 천주교활동이 광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종교탄압에 이어 해방 후에는 북한정권의 종교인들에 대한 숙청과 처형으로 북한에서 종교는 범죄시 되었고 현재 외국인 참관용 교회 2곳과 성당 한 곳이 있을 뿐 여전히 종교예식은 조직화된 연극처럼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독일에서 온 천주교인들 특히 수녀들이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던 사실들을 그들의 증언을 통하여 전해 드리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인들이 무참히 처형된 것은 조선시대 왕족 권력의 붕괴에 겁을 먹은 봉건통치배들의 반종교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리고 1866년에 전국적으로 만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병인박해도 역사에 기록된 이조봉건통치의 반종교행위였습니다. 그때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1949년 김일성에 의해 북한정권이 자행한 종교인탄압은 현대판 김씨 왕족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반종교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80년 원산항이 외국인들에게 개방되면서 1886년 5월 프랑스와의 한불조약으로 이조봉건정부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천주교 선교활동을 묵인하여 함경도 지역의 여러 곳에도 천주교 교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900년대에 들어와서는 원산과 평양 등 북한 곳곳에 많은 천주교 교구들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성 베네딕도수도회가 서울교구에서 함경도 지역의 교구들의 사목을 인수하면서 많은 독일인 선교사들이 파견되었고 여성들로 구성된 수녀회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1925년 11월에 독일에서 4명의 수녀가 원산에 도착하였고 이후에 수십여 명의 수녀들이 평양과 함흥, 원산지역의 수녀회들에 파견되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북한정권 설립 초기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적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은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 지휘부의 권고와 국제사회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당시 천주교 신자들 중 일부가 북한정권의 공산당 정책에 동조하면서 정권수립을 지지하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이 주장입니다.

김일성은 1949년에 들어서면서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노골적으로 강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49년 5월 10일에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이 강제로 해산되었고 5월 14일에는 베네딕도수녀회 함흥분원에도 정치보위원들이 들이 닥쳐 수녀들을 원산에 있던 임시교화소로 끌어갔습니다. 이들은 평양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다가 전쟁 전 기간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에 있었던 옥사덕수용소에서 정치범 취급을 당하였는데 수용생활기간은 무려 4년 5개월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덕원수도원과 원산수녀원에서 체포되었던 외국인 신부와 수사, 수녀는 모두 67명으로, 그 중 25명이 희생됐고 42명만이 살아남아 1954년 1월 12일에 독일과 프랑스 등 본국으로 귀환 되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알 수 없었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사실도 모르고 1954년 1월 독일로 귀환된 수녀들 중에 벨트비나수녀 등 일부 수녀들은 1958년에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대구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사랑과 나눔을 위한 종교생활로 여생을 보내면서 수용소생활을 고백하여 당시 북한정권의 반종교정책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대구에 가면 당시 독일에서 온 수녀들이 북한의 수용소에 입고 있었던 옷과 장갑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949년 처음 북한보위부에 끌려가서 생활하였던 함흥인민교화소 감방은 가로 1m, 세로 3m 정도의 독감방이었습니다. 주는 식사도 갖가지 잡곡을 섞은 밥덩어리었고 국이라고는 소금물에 배춧잎이 떠 있는 멀건 국물이 전부였습니다. 국을 담아오던 소래(양동이)는 청소할 때 걸레를 빨던 소래를 대충 씻은 것이었고 걸레는 너무나 낡고 더러워 바닥이 잘 닦여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거의 2달 동안 원산과 함흥인민교화소에서 감옥생활을 강요당했던 독일인 수녀들은 그해 7월 10일에 평양인민교화소로 이감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그들을 이송하기에 앞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입던 수도복과 머릿수건, 소지품 등을 모두 강제로 회수하고 속옷과 속치마만 걸친 채 끌어갔습니다. 평양인민교화소에 끌려간 천주교인들 중에 독일인 선교사 8명과 조선인 신부 6명은 북한당국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곳에서 한 달이 거의 되어오던 1949년 8월 5일에 살아남은 약 60여 명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평양에서 북쪽지방인 자강도의 깊은 산골짜기로 다시 이감되었습니다. 그들이 자강도 만포에서 다시 전천에 있는 옥사덕수용소로 옮겨가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에 당한 고초는 참으로 처참하였습니다. 배고픔을 견뎌내야 하고 육체적인 착취 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들은 덕원수도원에서 가져온 쌀자루에 남았던 밀알로 밀밭을 일궈 밀을 재배하여 제병을 만들었고 산에서 따온 머루로 술을 만들어 미사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은 이렇게 어렵게 미사성제를 봉헌하면서 그나마 지옥같은 수용소 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에서 그들은 옥수수농사와 감자농사를 주로 하였고 겨울에는 숯을 굽는 일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북한주민들은 “도급제가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감옥에서 그들에게는 하루 노동이 개인 도급제로 할당되다 보니 육체적인 노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한 기자가 대한민국의 대구에 있는 베네딕도수녀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옥사덕수용소 체험자인 벨트비나수녀에게 “옥사덕수용소에서 가장 힘겨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녀는 '호미질'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평상시에도 의자나 소파, 침대생활을 하면서 무릎을 굽히지 않고 생활하고 농사를 지어도 서서 호미질을 하는 유럽인들에게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밭김을 매는 호미질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수녀들은 농사일 외에도 짐승을 기르고 산나물을 깨서 바쳐야 했으며 다 찌그러져간 감옥을 수리하는 일도 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지옥같은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도 교화소 간수들의 눈을 피해 미사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영양상태가 나빠지고 병이 들어도 약을 쓸 수 없어 25명이 수용소에서 처참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당시의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을 그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가 간수들이 피우다가 버린 담배종이를 모아서 시로 남겼는데 이 시구절들을 보면 옥사덕수용소에서 그들이 당한 참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대한민국 대구에 있는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에서 생활하면서 1954년에 출옥하면서 수용소에서 몰래 썼던 시들을 모아서 ‘구름아, 너 무엇을 노래하느냐?’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그녀가 1950년에 쓴 시 ‘강제 노동수용소’에는 “종일토록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쉴 틈 없는 일, 새벽부터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욕설과 책망뿐, 그들은 우리를 일하는 짐승처럼 밭으로 몰아내며 독촉하고 끝없이 괴롭힌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1951년에 수용소에 쓴 시 ‘카이사르에게 인사’에는 “어두운 밤에 실려가 판결 없이 종살이하는 감옥으로 쳐 넣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누가 아는가?... 공산당들은 목적하는 바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 모두를 죽게 하고 싶었으며 우리의 거룩한 영예를 바라지 않았다. 피 흘리는 순교도 원하지 않고 서서히 죽어가게 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목표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수도가족은 이미 너무나도 많이 죽어갔다”라고 외쳤습니다.

북한당국이 조선카톨릭협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인도주의적인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고 마치나 북한 내에 천주교인들이 자유롭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정성을 보여 주자면 당시 수용소에서 짐승처럼 착취당하고 죽어간 그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입니다. 김정은은 가난과 예속,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허위로 가득 찬 수령우상화사상인 주체사상선전을 그만두고 북한주민들에게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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