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종교-평양숭실학교

김주원∙ 탈북자
2019-01-22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사진은 2017년 7월 28일 주북 러시아 대사관에서 숭실전문학교 식수 기념석 제막행사가 열리는 모습.
사진은 2017년 7월 28일 주북 러시아 대사관에서 숭실전문학교 식수 기념석 제막행사가 열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이 다닌 숭실중학교는 혁명역사시간과 회고록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학교가 어떻게 개설되었고 지금까지 학교가 운영되어 온 역사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숭실학교가 생기게 된 동기와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자들이 노력하여 성장하던 과정, 그리고 이 학교의 교육이념 등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숭실학교가 미국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 裵緯良)에 의해 1897년 10월에 개교될 당시 이름은 숭실학당이었습니다. 당시 학교 건물이 없어 베어드 교장은 평양시 중구 신양리, 지금의 보통강구역 류경1동의 자택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로 처음 이 학교를 열었습니다. 처음에 배워준 학과목으로는 성경, 한문, 수학, 음악, 체조였으며 이를 위해 조선인(한국인) 교사로 한학자(漢學者) 교사와 박자중(朴子重) 교사 등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의 학업 열의에 감탄한 베어드 교장은 1900년에는 학년을 5년으로 하는 중학교의 교과과정을 시작하면서 이름을 숭실중학교로 개명하였습니다.

1901년에 미국인 선교사인 윌리암 스왈렌(William L. Suallen)이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상속받은 유산으로 평양 신양리에 토지를 사서 2층 교사를 짓는데 기여하면서 숭실학교는 중학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학교 구내에는 근로장학사업을 위한 목공실, 인쇄실, 철공실, 주물실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에서 스왈렌 선교사를 소안론(蘇安論)이라고 부르며 존경한데는 그가 미국에서 당시 사과나무 묘목 150여 그루를 가져와서 부산항을 거쳐 대구와 북한의 황주지역 교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으로 더 이름이 났습니다.

미국에서 농과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공부를 하여 선교사가 되었던 소안론 선교사 는 후에 숭실대학교 농학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처음 선교사의 저택 사랑방에서 시작된 평양 숭실학교는 2년제 중학교 과정에서 4년제 대학과정으로 발전하게 된 데는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평양 주민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대학 설립을 위하여 가보로 귀중히 여기던 소중한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였습니다. 1906년 7월 13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내용을 봐도 당시 많은 평양주민들이 돈과 패물을 기부하여 대학 설립에 기여한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사는 본 신문사 사장이 숭실대학의 설립을 축하하는 글에서 “근래에 평양 예수교회에서 대학교를 설립하는데, 일반 남자들의 으레히(응당) 있는 일이어니와 이 지역의 부녀들은 금은 반지, 패물 등속을 그 이름도 밝히지 않고서 앞 다투어 기부하여 며칠 되지 않아 수천 원에 이르렀다 하니, 이러한 의협의 기풍은 세계 열국에도 많지 않은 일이니, 이 나라 안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것이다.” 라고 토로하였습니다.

숭실이라는 교명의 숭실(崇實)은 조선 후기의 실학 정신을 계승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담긴 성경에 입각하여 실업(實業)을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이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점차 시간이 가면서 신학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아져 1905년에는 숭실중학교 재학생이 160명이나 되었고 전문학교 설립이 절실해졌습니다. 결국 1906년에 대학부(大學部)를 개설하였고 12명의 학생들이 1기로 입학하였습니다. 중학교 과정에 이어 2년을 더 연장하여 신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배워주는 대학부과정은 점차 인기를 얻었습니다. 숭실학교 대학부는 1908년에 2명의 1기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10년에는 재학생이 54명, 졸업생 수는 7명이었습니다. 당시 학교의 교명은 영어로 유니언 크리스천 칼리지(Union Christian College)였습니다.

일본식의 학교 명칭인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로의 전환과 교사들과 학생들의 신사참배가 강요당하는 등 민족적인 수난과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사립중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킨다는 명분 아래 새로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방침을 내세웠고 전문학교 등 상급학교 입학 자격자를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하지 않는 학교는 무자격 학교로 인정하고 졸업생들의 취직과 진학에 따른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포하였으나 숭실학교를 비롯한 기독교계 학교들은 선교의 근본 목적을 위해 성경 과목과 기도회를 정규 과정표에 넣으려고 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숭실학교는 항일운동과 기독교정신배양운동을 계속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벌린 운동으로는 을사조약 반대운동, 평양지역 3·1독립만세운동, 신사참배반대운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차이석, 손정도, 김창준, 박희도, 조만식, 배민수 등 독립운동가들이 이 운동의 주역을 맡아 나섰던 것입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시위군중들에게 배부된 3천매의 독립선언문도 이 학교의 인쇄실에서 인쇄한 것만 보아도 숭실학교의 애국적인 운동에 대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숭실학교 출신들 속에서 반일항쟁투사들이 배출되자 일제는 숭실학교를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이라며 경계를 하였고 항상 주시하였습니다.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경찰이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는 뜻으로 자기들의 의사를 잘 따르지 않는 조선인들을 가리켜 부르던 대명사였습니다.

일제의 집요한 전문학교규칙(專門學校規則) 변경정책으로 숭실학교 대학부는 1925년에 숭실전문학교로 개편되었습니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1937년 10월 숭실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에 자진 폐교를 결정한 폐교원을 제출하였고 포악한 일제 탄압 하에 40여 년의 역사를 남긴 채 1938년 3월 31일에 폐교되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짓눌렸던 종교인들은 숭실학교의 부활을 꿈꾸며 평양에 다시 새 학교의 복원을 기대했지만 김일성의 종교탄압정책으로 숭실학교는 평양에서 서울로 이전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의 숭실중학교는 1948년 9월 15일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던 동양척식회사 건물에서 재건되었습니다. 지금 서울시 은평구 신사동에 있는 숭실고등학교는 전후에 서울시 용산구로 이전하였다가 1972년 9월에 대지 1만 천 2백여 평과 2층 건물, 12개의 교실을 가진 숭실학교를 계승한 학교입니다.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를 계승한 대학은 현재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해 있는 숭실대학교입니다. 북한에서 가장 큰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보다 더 큰 규모로 발전한 숭실대학교는 통일이 되면 평양캠퍼스를 설립하여 120여 년 전에 존재하던 숭실전문학교가 이루고자 한 꿈을 반드시 성취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숭실대학교는 인문대학 9개 학과, 자연과학대학 5개 학과(부), 법과대학 2개 학과, 사회과학대학 6개 학과(부), 경제통상대학 4개 학과, 경영대학 5개 학과(부), 공과대학 6개 학과(부), IT대학 6개 학과(부), 독립학부 3개 학부, 베어드학부대학 등 9개 단과대학에 총 44개 학과(부)를 운영하고 있다.

숭실대학교 황준성총장은 대학교 홈페이지의 총장인사말에서 ‘평양에서부터 자진 폐교와 분단의 아픔을 겪으며 서울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숭실대학교는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워내듯이 창의적인 도전을 계속해 왔다’며 “하나님이 꿈꾸시는 대학,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가는 대학, 세상에 희망과 등불이 되는 대학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교육을 계속하여 실천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북한당국은 여전히 김형직이 다닌 학교명인 숭실중학교에 대한 소개에만 그치고 아직도 이 학교의 연혁과 현재의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를 계승한 숭실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는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에 생긴 종교학과와 평양신학원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