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위사령부검열과 서옥순 (2)

김주원∙ 탈북자
201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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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자정까지 영업을 하는 사실상 편의점 형태의 '연쇄상점'이 등장했다. '황금벌상점'이라는 명칭의 이 상점은 식료품과 각종 일용품을 판매하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영업을 한다.
북한에 자정까지 영업을 하는 사실상 편의점 형태의 '연쇄상점'이 등장했다. '황금벌상점'이라는 명칭의 이 상점은 식료품과 각종 일용품을 판매하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영업을 한다.
Photo: RFA

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시간에 이어 1999년에 양강도 보위사령부 검열 당시 양강도 혜산상업관리소 서옥순 지배인이 처형된 이야기를 계속 해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북한 동포 여러분들은 다 아시는 일이지만 북한에서는 한 사람이 처형되면 남은 가족 역시 반동집안으로 취급되어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북한에서 식의주라고 하면 먹고 입고 거주하면서 사는 주택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민위원회에는 량정과가 배급을 책임지고 급양과는 사회급양망인 식당을 관리하며 상업부는 입고 쓰는 모든 생활필수품을 주민들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주택배정과는 살림집 입사증을 발급하여 주민들이 거주하면서 사는 것을 책임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 식의주 해결과 관련된 부서들을 ‘먹을 알’이 있는 부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업과 산하의 혜산상업관리소 역시 ‘먹을 알’이 있는 인기 있는 직장입니다. 혜산시에만 혜산동, 위연동, 송봉동, 춘동, 혜장동 등 10곳이 넘는 지역에 식료품상점과 공업품상점이 있습니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식료품상점들에서 된장과 간장, 식용기름, 소금, 소다, 계란 등 다양한 식품들을 매 세대마다 구매권에 따라 공급해줬습니다. 공업품상점들에서는 학습장과 만년필 등 학용품들과 신발, 옷, 그릇 등 생필품들을 공급하였습니다.

상업관리소에는 인수원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상업관리소 창고들에 있는 공급물자들을 매 식료품상점들과 공업품상점들에 직접 가져다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제가 고등중학교, 지금의 고급중학교에 다닐 때 한 학급에 다니는 동창 중에 어머니가 상업관리소 인수원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부탁하면 그 친구가 자기의 어머니에게 가서 쪽지 한 장을 받아다가 식료상점에서 구매권이 없어도 계란이나 기름 등을 살 수 있었습니다.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에 식료품과 공업품공급이 원활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항상 모자라는 수준이었습니다. 된장, 간장이 모자라도 당시에는 시장에 나가서 살 수 없었고, 오직 이런 상업망을 통해서 구매권을 가지고 구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명절공급용 돼지고기도 식료품상점들에서 공급하였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마음대로 골라 살 수 없던 처지에서 상업관리소 직원의 쪽지 한 장이 큰 은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술과 담배공급도 국가에서 이 상업망을 통해 하던 때여서 남자들에게도 상업관리소 직원이라면 친해보고 싶은 직업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양강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들쭉술도 상업관리소에서 상점들에 공급하게 되어 있어, 어머니가 상업관리소 인수원을 하였던 친구의 집에 가면 항상 들쭉술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어머니가 상업관리소 인수원을 하면서 많은 간부들을 잘 알고 있어 대학을 갔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기간에 노동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제가 이 친구와 친하게 지낸 덕에 필요할 때마다 일반인들에게는 공급이 제한된 40%(알콜주정이 40도) 들쭉술도 얻어서 사업용으로 쓴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업관리소 인수원 직업도 권한이 있었으니 상업관리소 소장이라면 그 권한은 대단하였습니다. 이런 좋은 직업을 계속 유지하려고 서옥순은 간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잘 들어 주곤 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경제난으로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을 하지 못하였고 결국 공업품과 식료품 생산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주민공급 수량이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상업관리소의 특세는 더 커졌습니다. 중국과 마주한 국경도시인 혜산시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사사여행자들이 중국에서 많은 물건들을 들여왔습니다. 주민들은 식료품과 공업품은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으면서 중국물건들을 들여다가 장사를 하는 국영상점에 대한 불만과 상업관리소에 대해 비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을 통해 김정일이 노린 것은 고난의 행군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죽자 자기에게로 쏠리는 주민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주민들은 노동당 정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 북한의 지도자인 김정일의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정일은 이러한 주민들의 불만을 중간간부들이 잘못을 해서 고난의 행군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인식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서옥순은 주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한 제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보위사령부는 그의 죄가 주민들에게는 상품들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았고 간부들에게만 아부아첨을 하면서 공급물자들을 뇌물로 섬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에는 경제에 무식한 김정일의 잘못으로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주민들에게 공급할 물자들이 제대로 상업관리소에도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문제로 삼은 것은 상업관리소 서옥순 소장이 상업관리소 소속의 상점들에서 중국물건들을 팔게 하면서 받은 뇌물로 간부들을 섬겨서 두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에서 서옥순 소장은 처형되었고 맏아들 철규는 당 간부에서 해임되어 가족과 함께 시골로 추방되었으며 둘째아들은 상업대학을 다니다가 퇴학당하였습니다. 당시 맏아들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혜산시 시당 간부부 양성과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간부부 양성지도원은 당 간부를 양성하는 일을 맡아하는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서옥순 소장은 아들만은 자기처럼 섬기는 삶이 아니라 간부가 되어 당당하게 아랫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간부가 되기를 소원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상업관리소 소장인 어머니가 처형되면서 시당 간부과 지도원이었던 맏아들은 하루 아침에 해임철직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강도에서도 인적이 드문 시골의 산속에 추방되어 5년 이상이나 협동농장 농장원으로 일하였습니다.

보위사령부 검열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그에 대해 부당하다고 신고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내적으로 보위사령부 검열기간에 처형된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회복시켜주라는 지시를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적게 하려는 꼼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상업관리소 서옥순 소장도 중앙당 재검열에서 처형할 정도의 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반동분자의 죄를 벗게 되어 농장원이었던 맏아들 가족도 혜산으로 올라왔지만 당 간부로 다시 등용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중앙당에서 회복시키면서 전달된 내용은 당시 보위사령부 검열이 과잉조사가 이루어져서 교양할 대상들마저 마구 죽인 것에 대해 반성한다면서 이런 조치가 김정일의 배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은 당시 보위사령부 검열이 북한주민들이 김정일에게 쏠리는 분노와 북한제도에 대한 반발을 일부 간부들의 잘못으로 돌리기 위해 김정일 자신이 내린 지시였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북한주민들은 김정일이 ‘총소리를 내라’고 지시하여 ‘보위사령부 검열’ 이 강행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이 다른 도들에 대해서도 보위사령부 검열을 계속 강행하려고 했던 1999년 10월에는 북한 전 지역에 보위사령부 공개처형공포가 살인적인 대학살로 받아들여지면서 주민들이 벌벌 떨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북한을 탈출하였습니다.

중앙당에서 상업관리소 소장의 과오를 벗겨주어 아들인 철규지도원이 다시 혜산에서 올라왔지만 이미 그의 어머니인 상업관리소 서옥순소장은 공개 처형되어 죽은 후였고 그들이 살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배정된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당 간부, 특히 당 간부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부서인 간부양성지도원 자리는 다시 갈 수 없는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철규지도원의 아내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그 여동생은 언니의 시어머니인 상업관리소장이 처형되자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의 처언니(처형)의 시어머니가 공개처형 되고 혜산시가 살벌한 공포에 휩쓸리자 살인마들의 천국인 북한에서 더 이상 살기를 포기하고 탈북하였습니다.

당시 양강도 도인민위원회 군수담당 지도원이었던 그는 아내와 아들을 남긴 채 탈북을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정(정씨였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지도원이 탈출하자 그의 형인 국경경비대 혜산여단 군의도 더 이상 악마의 소굴인 북한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탈출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였습니다.

지금도 저는 김일성종합대학에 함께 다녔던 철규, 그가 어머니의 처형으로 추방되어 농장원으로 전락되어 슬픈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상업관리소 소장이라고 해도 간부들이 요구하는 상품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해임철직되어야 했던 불우한 서옥순 지배인, 어머니를 잃고 농장원으로 추방되어야 했던 그 억울한 심정은 오늘도 북한주민들이 안고 살아야 할 공포심으로 남아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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