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 ‘만수무강연구소’까지 대물림

김주원· 탈북자
2015-02-24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수산가공품 공장인 갈마식료공장도 현지지도하고 있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수산가공품 공장인 갈마식료공장도 현지지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책임진 연구소들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북한에는 이런 연구소들과 함께 운곡목장과 룡성특수 식료공장을 비롯해 김일성 일가에 먹을거리만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공장, 기업소, 목장들이 따로 있습니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와 관련된 연구를 ‘호위과학연구’라고 부르며 여기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호위과학전사’라고 불렀습니다. ‘호위과학’ 연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기초과학원’은 2천여 명의 연구사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청산연구원’과 ‘청암산연구소’에도 각각 130명과 280여 명 정도의 유능한 전문가들이 있는데 이런 인원을 합치면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위한 연구에 모두 2천5백명 정도의 과학자들이 동원된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전문 연구인력이 2천5백명 정도라고 하니 그리 큰 규모가 아니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구 인력에 따라 붙는 보장일꾼들과 관리일꾼들까지 모두 망라하면 그 규모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지어 ‘호위과학’ 연구소들을 지키는 호위사령부 병사들까지 다 포함시키면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위한 연구에 얼마나 많은 인원과 비용이 들겠는가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호위과학’ 연구기관의 이름과 기능은 평양시 주민들도 모를 만큼 철저한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막연하게나마 부르고 있는 ‘만수무강연구소’라는 이름도 실은 이들 ‘호위과학연구소’들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호위과학’ 연구기관에 누가 ‘만수무강연구소’라는 별칭을 달아 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북한 주민들도 ‘호위과학연구’라면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만수무강연구소’라고 하면 훨씬 이해를 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앞으로 북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와 관련된 ‘호위과학’ 연구기관을 ‘만수무강연구소’로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만수무강연구소’는 ‘기초과학원’, ‘만청산연구원’, ‘청암산연구소’ 이렇게 3개로 나눠져 있습니다.

‘만수무강연구소’의 기초는 1970년대 호위사령부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호위사령부 1총국에는 식품조리과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식품조리과는 김일성 일가의 식사와 먹을거리들을 담당하는 한 개 부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김정일이 후계자로 지목되고 호위사령부의 규모도 배로 커졌습니다.

호위사령부의 규모가 커지면서 김일성 일가에 안전한 먹을거리를 보장하면 그만이었던 식품 조리과의 단순한 임무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늘어난 모든 가족들의 입맛에 맞게 음식을 전문화하고 세분화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전통적인 조리법과 외국의 음식을 만드는 비법만으로는 안됐습니다. 개인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완전히 새롭게 연구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호위사령부 1총국 식품조리과에서 독립되어 나온 연구기관이 바로 ‘청암산연구소’였습니다. 북한 ‘만수무강연구소’의 시발점인 ‘청암산연구소’의 출연에는 김정일의 입김이 상당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김영주와 김평일을 비롯해 쉽지 않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어렵게 후계자의 지위에 오른 김정일의 사색은 온통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한데만 집중됐습니다. 그런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만수무강’ 연구였습니다.

소위 김일성 개인의 체질에 맞는 건강장수 비법을 연구하겠다는 건데 이건 어떤 의미에서 후계자의 지위를 굳힌 김정일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연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은 ‘만수무강’ 연구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의 건강장수를 위해 설립된 ‘청암산연구소’는 평양시 룡성구역의 7층짜리 건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건물과 별도로 떨어진 곳에 연구용 사육장과 실험공장이 있었는데 연구원들은 모두 호위총국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연구소 내부는 4개의 부서와 3개의 독립연구실로 꾸려졌는데 연구 설비들은 대부분 독일이나 미국에서 수입했습니다. 연구용 설비 수입에만 3백만 달러가 들었는데 1970년대에 3백만이면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큰 액수의 돈이라고 합니다.

김일성 일가의 사생활이 워낙 비밀에 속하지만 그 중에서도 ‘청암산연구소’는 최고의 비밀기관에 속합니다. ‘청암산연구소’의 존재는 북한의 몇몇 고위간부들만 알고 있을 뿐 이곳에서 어떤 실험과 연구가 진행되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만수무강연구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평양시 대성구역 룡북동에 위치한 ‘기초과학원’입니다. 기초과학연구원’은 김일성의 생일 70돌이 되는 1982년에 설립되었는데 연구원만 2천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연구소입니다.

‘기초과학연구소’의 설립 배경에는 금수산의사당 경리부장이었던 신상균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일성 일가의 생활을 보장해오던 내각 제2재정경리부가 금수산의사당경리부로 확장 개편됐습니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의 초대 부장은 김일성이 직접 임명한 신상균이었습니다. 신상균은 금수산 의사당 경리부의 규모를 늘리고 김일성의 더 많은 신임을 얻기 위해 ‘기초과학연구소’을 구상해냈습니다. ‘기초과학연구소’의 설립 일도 김일성의 생일 70돌에 맞추어 그 의미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설립 초기만 해도 ‘기초과학원’은 ‘호위과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 분야를 ‘호위과학사업’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초과학연구소’는 1980년대 말 금수산경리부장 신상균이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에서 중앙당 재정경리부로 소속이 변경 되었습니다. ‘기초과학연구소’를 중앙당 재정경리부 산하에 넘길 데 대한 지시는 김정일이 직접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만수무강연구소’ 소속인 ‘만청산연구원’이 있는데 ‘만청산연구원’은 김일성의 생일 75돌이 되던 198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김정일에게 ‘기초과학연구소’를 빼앗긴 금수 산의 사당 재정경리부장 신상균이 신설하였고 그의 아들인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화학부 출신 신영민이 당, 행정을 책임지도록 하였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이라는 명칭도 김일성의 ‘만수무강’과 김정일의 ‘영원한 청춘’을 위한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입니다. 김정일에게 ‘기초과학연구소’를 빼앗긴 신상균은 ‘만청산연구원’을 북한에서 제일 큰 건강연구 기관으로 성장시킬 야심을 키웠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의 봉화진료소와 마주하고 있는데 높이가 2.5m인 시멘트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마저도 안심치 않아 호위사령부 군인들이 24시간 무장보초를 서는 연구기관입니다.

이런 연구시설들에서 개발한 고기류와 과일, 야채류 등 국내산 9호 제품은 수백 가지가 넘습니다. 아무리 좋은 식료품이라고 해도 ‘만수무강연구소’에서 장수효과가 인정되어야만 김일성 일가에 공급되었습니다.

이렇게 큰 연구소들과 특수목장, 식료공장까지 따로 가지고 건강에 좋다는 동서고금의 모든 보약과 식료품을 다 먹으면서 호화생활을 누렸어도 어찌된 일인지 김일성도 그래, 김정일도 모두 제 명을 다 살지 못했습니다.

그 호화사치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김정은 역시 다리를 절룩거리며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만수무강연구소’까지 대물림한 김정은의 명은 언제까지일지,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