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중국의 대북원조

김주원∙ 탈북자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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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국경무역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중국 단둥의 호시무역구.
북중 국경무역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중국 단둥의 호시무역구.
/연합뉴스 제공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6.25남침전쟁이후 중국정부가 북한에 지원한 원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중국정부는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친중파 간부들이었던 상업상 윤공흠,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 문화선전부 김강 부상, 건재공업국 리필규 국장 등이 숙청되자 북한정부에 불만을 나타냈고 이것이 대북원조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나 러시아와 긴밀해지는 소위 ‘친소화’ 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었기에 대북원조를 완전히 폐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중국당국이 1960년대 북한에 제공한 경제적 지원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1달이 지난 9월에 북한당국은 중국정부에 무상원조 2차년도분에 해당한 5천만 위안의 제공과 20만톤의 식량원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1957년 4월 10일 김일성은 5개년 계획 초안을 북한주재 중국대사에게 통보하였지만 중국대사는 대북추가원조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냈고 6월 초에 북한정부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겠다고 하였으나 중국정부는 회신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러시아와 국경을 하고 있는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두 나라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중국에게는 방파제처럼 일본과 미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고 소련에게도 역시 당시 일본과 영토문제로 분쟁을 하면서 동시에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북한이 동방초소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대륙침략의 교두보와도 같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북한이 차지한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중국은 자국의 세력권 안에 북한을 묶어두려는 야망을 버릴 수 없었고 이것이 대북원조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중국정부는 1958년 10월 29일 당시 부총리였던 천의(陳毅)를 통해 ‘대외경제·기술원조업무 지시에 관하여’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지시문에는 ‘대외경제 및 기술원조 업무는 엄숙한 정치임무이며 형제국가와 민족주의 국가의 인민에 대한 우리의 국제의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는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과 번영을 증진하고 민족주의 국가와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 진영의 침략과 확장을 억제하고 타격하는 것으로 그 중요 의의가 있다’라고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960년 9월 북한 경제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한 무역상 이주연에게 중국 총리 주은래는 “최근 알바니아, 꾸바(쿠바), 기네(기니), 알제리아(알제리) 등 국가에서 원조를 요구하고 있지만 북한에 대해 우선적으로 원조를 보장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원조가 아닌 차관 형식으로 지원하지만 제 기일에 갚을 수 없으면 10년이나 20년으로 연기해서 갚으면 된다”는 특별대우사항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북한당국은 중국정부에 견직공장은 1960년과 1961년, 1962년 3년에 걸쳐 매해 1개씩 3년간 3개를 건립하도록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연간 생산량 3만톤 정도의 제당공장, 년 10만톤 규모의 제분공장 건립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일 생산규모가 30만톤인 제지설비 6대, 시간당 50만톤 규모의 용광로 건설에 필요한 지원도 요청하였습니다.

중국정부는 이 모든 제안에 동의하였고 여기에서 힘을 얻은 북한당국은 추가적으로 17종의 야금장비 29대, 11종의 선광설비 97대, 15종의 대형 절삭기 20대, 방직기계 50대, 광궤소형기관차 7대, 광궤열차 100여대를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정부는 대약진 운동으로 국내 사정도 어려웠지만 요구한 항목에서 중국에서도 자체 제작이 불가한 장비 등에 대해 북한당국에 양해를 구했습니다. “돈 꿔주는 사람이 서서 꿔주고 돈 빌리는 사람이 앉아서 받는 격”으로 원조를 제공하는 중국정부가 오히려, 원조를 받는 북한당국을 달래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압록강에 건설하는 운봉수력발전소 건립은 중국과 북한이 공동투자로 하되 북한 측의 투자액은 중국정부가 차관형식으로 다 맡기로 했습니다.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운봉발전소가 건설되었고 평양정밀기계공장과 평양베아링공장, 평양방직공장 완공되었습니다. 1960년 5월에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은 모택동(마오쩌둥)과 회담하면서 약 4억 위안의 원조를 약속받았습니다. 그해 9월 북한대표단을 중국에 초청한 중국당국은 중국과 북한사이의 경제협력을 위한 합의문에서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장기차관으로 4억 2천만 루블을 제공한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정부는 북한에 다이야(타이어)공장, 무선통신기기공장, 일용품공장 건설과 면방직설비, 무선통신설비 등 관련 설비들도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제2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주은래와 회담을 가졌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동구라파 공산당으로부터 공격받고 있던 처지였는데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편에 서서 형제당 간의 상호 지지와 내정불간섭, 단결유지를 재천명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당시 북한당국이 중국정부를 지지성원한데 대하여 전문가들은 중국의 당시 대약진운동과 농촌집단화에서 인민공사 추진사업이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협동농장 제도 채택과 유사하였기에 정책적인 공감대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택동과 김일성은 스탈린옹호주의자인 반면 당시 동유럽국가들은 소련공산당의 반스탈린운동, 개인영웅주의 배격에 공조하던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중국과 국경하고 있는 지역이 소련보다 더 광범위한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중국 동북지방은 북한의 후방지역이며 만약 북한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략적인 지역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1959년부터 1962년, 3년간은 중국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나 1962년 1월에 중국정부는 북한과 ‘1962년도 상호물자공급협정’을, 11월에는 ‘제2차 북중 장기무역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협정들을 통해 중국정부는 북한에 1963년부터 1967년까지의 7개년 계획수행에 요구되는 연료, 광물, 농산물, 화학제품, 금속, 설비 등 주요물자들을 제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중국정부에 의해 당시 건설된 공장들로는  자강도 만포타이어공장, 평남도 남포통신기계공장, 평양견방직공장, 만년필공장, 경공업공장 등입니다. 당시 북한에 제공된 원조에 관해 중국 외교부가 중국정부에 보고한 자료에는 ‘북한공업 재건을 지원하는데 제공된 설계는 비교적 완벽하였고, 설비의 품질도 높았으며 적시에 운송되어 착오 없이 설치되었다. 북한에 파견된 기술자들도 적극적으로 책임성 있게 사업을 추진하여 기술전수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북한당국을 만족하게 하였다. 무역도 기본적으로 북한당국이 요청한 품목은 반드시 제공되었고 심지어 중국에서도 부족한 면화, 석탄, 고무, 수은 등도 오히려 북한에 우선적으로 제공하였다’고 밝혀져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북한당국의 이러한 무리한 대북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경제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면, 특히 중국의 자국 안보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지지세력을 유지하고 북한당국을 저들의 이해관계에 동조하는 속국의 차원에서 이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중국정부의 이러한 대북지원에 대해 고마움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안보를 위한 안보비용으로 여겼으며 이것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혁명을 위해 응당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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