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미국의 대북지원

김주원∙ 탈북자
2020.05.13
wfp_rice_b WFP로부터 지원받은 쌀을 창고로 옮기고 있는 북한 노동자.
AFP PHOTO

북녘 동포 여러분,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 미국정부의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 부시대통령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당시에 시장에서 미국 옥수수와 영양가루, 식용기름 등을 사먹어본 북한주민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부시대통령은 미국대통령 선거기간이었던 2000년에 북한을 불량국가로 규정하면서 대북 강경정책을 강조했고 행정부장관이었던 라이스 장관도 90년대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일방적인 유화정책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2000년대 미국의 대북정책은 부시대통령이 미국대통령으로 재임했던 2001년부터 2008년 사이의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북지원정책입니다. 부시대통령은 1993년에 북미사이에 체결한 제네바 합의가 북한의 핵개발중단을 완전무결하게 보장하는 검증장치가 부족하다고 강조했고 제네바 합의의 이행, 미사일 발사를 억제하기 위한 규제 등을 대화를 통해 해결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과 미사일발사 금지, 무기감축, 북한의 인권문제, 생화학무기개발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정부는 북한당국의 대량학살무기인 핵개발과 자국 내 국민들에 대한 공포정치 등 반인륜적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어려운 북한주민들에 대한 지원은 아끼지 않았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집권 시기에 비해 대북지원액이 28%가 늘어난 10억 달러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대북지원 건수도 클린턴 정부시기보다 186%가 늘어난 292건에 달했습니다.

당시 미국정부의 대북지원 방식은 국제기구를 통한 비중이 가장 컸고 기업과 시민단체 순서로 대북지원 비중이 높았습니다. 세계식량기구, 유엔개발계획, 유엔아동기금 등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지원 비중은 전체 지원액의 39%를 차지하였습니다. 반면에 클린턴 정권 시기에 51%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미국정부의 직접 지원은 6%로 감소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주민들이 영양부족으로 받고 있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국제기구를 통해 우회적으로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였는데 이러한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을 다자간 지원(Multilateral Aid)라고 합니다.

북한당국은 클린턴 전 정권에서 미국 정부차원의 지원으로 제공되는 식량용기인 마대에 미국이라는 글자가 있었던데 비해 국제기구의 이름으로 북한에 식량 등 대부지원이 제공되니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주민들에게 ‘미국은 불구대천의 철천지 원수’라고 강조해오던 북한의 선전이 미국의 인도주의적인 지원으로 희석되는 것이 좋지 않았던 북한당국의 처지에서 국제기구를 통한 지원방식이 대환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정부가 2004년 9월 28일에 북한인권법을 채택하면서 북미관계는 냉각되었고 그에 따라 대북지원은 감소되었습니다.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정치범관리소 해체, 공개처형 중단 등 북한주민의 인권개선과 인도적 지원, 탈북민들의 중국 내 보호 등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미국정부의 북한인권법 채택에 대한 북한당국의 반발은 미국의 대북지원 거부라는 카드로 돌아왔습니다. 북한당국은 2005년 8월에 북한 내에서 활동하는 국제식량기구를 비롯한 모든 국제기구에게 인도적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통보했고 결국 국제식량기구는 북한에서 철수했습니다.

미국정부와 북한당국은 2005년 9월 19일에 북한의 핵계획 포기, 한반도 평화체제 보장을 위한 9.19공동성명을 채택했지만 그 다음해인 2006년 10월에 북한당국은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을 강행했습니다. 5일 후에 유엔은 유엔안보리 결의 1718호를 채택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관련 물자교역 금지, 북한 자산 동결 등 강한 대북제재로 북한당국을 압박하였습니다.

대북제재로 어렵게 된 북한당국은 미국과 회담을 요청했고 2007년 1월에 김계상 부상과 미국 힐 차관보의 회담에 이어 2월에는 6자회담 3단계 회의가 재개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북한 핵시설 폐쇄와 그에 따른 중유 5만톤 긴급지원이 2.13합의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5월에 북한당국이 미국에 영변 원자로 가동일지를 제출하면서 그해 11월에 50만 톤의 식량이 북한에 지원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네바 협의에서 결정된 중유를 인도적 지원이 대폭 감소했던 당시에도 글로벌 원유산업체인 비톨(Vitol)을 통해 북한에 제공하였습니다. 비톨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랄리아 등 전 세계 40개 지사를 통해 하루에 38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각국의 정유 산업회사들에 공급하는 회사입니다. 미국 정부는 일본과 한국 등 일부 나라들과 함께 북한의 플루토늄을 기초로 한 핵 시설 동결을 약속한 대가로 2008년에 20만 톤의 중유를 제공하였습니다.

2000년대 미국정부의 대북 지원방식은 1990년대에 비해 지원분야도 다양해졌습니다.  90년대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지원은 인도주의 분야와 경수로 발전소 건설인 케도(KEDO)에만 국한되었지만 부시 행정부는 인도주의 긴급식량지원 이외에도 무역진흥 등 경제성장분야, 에너지와 운송업 정책과 행정관리, 서비스업 등 인프라구축, 인권과 공공정책, 안보 등 거버넌스분야를 비롯하여 지원방식은 다양해졌던 것입니다.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지원방식을 택했던 부시 행정부의 인도주의 대북지원은 국제기구 외에도 기업, 민간시민단체, 종교기관 등을 통해서도 이루어졌습니다.  미국정부의 현물지원도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서 지원되었는데 현물 대부분은 식량지원이었습니다. 유엔세계식량계획의 경우 단순 쌀과 옥수수 등의 곡물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영양가루, 가루우유(탈지분유) 등 가공제품도 지원합니다.

당시 북한의 시장들에는 콩가루가 들어간 영양가루와 통졸임통에 들어간 가루우유제품들이 판매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정부가 유엔을 통해 북한에 지원한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저도 시장에서 2003년에 태어난 아들에게 이 가루우유를 사먹였는데 서유럽제품도 있었지만 한국산 제품도 판매되군 하였습니다.

대외원조를 담당하는 미국의 정부기관은 국제개발처, USAID(United State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입니다. 미국정부는 북한에 직접적으로 식량, 의약품 등을 지원하는 것과는 함께 국제개발처를 통해 북한 인권개선, 북한 민주화를 위한 시민단체들에도 지원을 하였고 이 지원에 대해서도 대북지원항목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저도 북한에 있으면서 대북라디오를 듣다가 미국정부가 북한인권법을 채택하고 중국 내에서 탈북민들을 구출하는 일에 수백만 달러를 지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던 생각이 눈앞에 선히 떠오릅니다.

부시 대통령이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되어 2001년부터 2008년까지의 8년동안에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북한 내에서 주민들을 공개처형하는 횟수도 많아지면서 북한인권법이 미국 국회에서 채택되었지만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도 벌써 마감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재임하였던 기간의 미국정부의 대북지원에 대해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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