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조형상징물 동상 건립

김주원∙ 탈북자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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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에 인민군 장병들과 각 계층 근로자들, 청소년 학생들이 헌화하고 있다.
평양 만수대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에 인민군 장병들과 각 계층 근로자들, 청소년 학생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 동포 여러분! 21세기에 지구상에 3대에 걸쳐 권력이 세습되는 곳은 북한이 유일합니다. 북한에서의 현대판 왕족세습정치, 군주독재체제가 가능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도 건축조형상징물에서 대표적인 동상 건립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건축조형상징물은 북한의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들에 세워진 대기념비와 동상, 탑, 사적비, 태양상, 영생탑, 현지교시판 등을 말합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기 민족을 위해 위대한 업적을 쌓은 위인을 대를 이어 기리기 위해 동상이나 탑, 기념관 등을 세워 보존하고 있으나 북한처럼 이렇게 한사람의 동상을 수백, 수천 개씩이나 세우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징물이나 건축물들은 세기를 이어 장기간 보존되기 때문에 다른 예술작품들보다 국민들의 사상 의식에 세대를 이어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북한에서 동상이 가장 처음 세워진 것은 1948년 10월 12일 만경대혁명학원에 세운 김일성 동상입니다. 그 이후 김일성이 한반도의 공산화를 실현할 목적으로 6.25남침전쟁을 일으키면서 건축조형상징물건설은 전시에는 멈추었으나 전후 어려운 상황에서 다시 혁명전통을 강조하면서 상징화건설을 추진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경제 형편도 어려운 상황에서 전후 첫 해부터 상징물 건설을 내세우기는 불편하였던 김일성은 2년이 되어오는 1955년 6월에 양강도 보천군을 ‘보천보혁명전적지’로 명명하도록 하였고 보천보전투승리기념비와 동상을 건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북한에서는 ‘혁명전통’이라는 정치 어휘가 처음 등장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으로 보천보전투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전개하였습니다. 보천보혁명전적지를 중심으로 전투진행과정을 보여주는 보천경찰관주재소, 포대, 전투지휘장소, 곤장덕 등 보천보전투관련 장소들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1962년에 보천보전투 25돌 기념일을 맞으며 김일성 동상이 완공되었습니다.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 배치 받은 김정일은 1967년 갑산파숙청 후 김일성의 위대성과 우상화선전에 집중하였습니다. 김정일은 동상을 비롯한 조형상징물 건축에 대해 “수령의 위대성을 높이 칭송하고 만대에 길이 빛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령을 형상한 동상을 정중히 모셔야 하며 또한 건축공간의 중심에 건립하여 사람들이 늘 수령의 형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들에게 수령의 품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높은 긍지와 자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보천보전투승리 30돌을 맞으며 1967년 6월 4일에 양강도 도 소재지인 혜산시의 도심 중앙에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이 건립되어 제막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의 제막식에 관해 조선중앙년감은 중앙과 도급 간부들과 군인, 청년, 근로자 등 5만여 명의 군중들이 제막식에 참가하였다며 관련 사진 4점을 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래에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영장이신 김일성 동지께서 영솔하신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해 진행된 보천보전투승리를 기념하여 혁명의 사적지 혜산시에 항일무장투쟁의 불멸의 위훈으로 아로새겨진 역사적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제막식행사관련 글이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천보전투는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것과는 규모나 양상, 피해자 수 등 진실과는 다릅니다. 보천보전투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후에 따로 전해 드리기로 하고 동상 관련 얘기를 계속하려 합니다.

북한 당국은 동상 건립 초기에는 우상화선전을 빨치산활동을 함께 했던 투사들의 동상을 세워 그들의 충성심과 혁명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습니다. 1964년 9월에 마동희 동상은 양강도 운흥군 신포리에, 박달 동상은 양강도 보천군 운남리에, 리제순의 동상은 양강도 보천군 의화리에 세워졌습니다. 위의 세 명은 당시 부수상이었던 박금철과 함께 국내에서 활동한 공작원 출신 투사들이었습니다. 1967년에 박금철이 종파분자로 몰려 처형되고 국내파의 많은 투사들도 숙청되면서 1968년에는 김일성과 소련군에서 복무했던 소련극동군사령부 88저격여단 출신의 투사들의 동상이 대대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동상으로는 김책, 류경수, 김경석, 조정철, 안길, 최춘국, 강건의 동상입니다.

1968년은 북한 당국에 있어 동상 건립에 국가재원을 마구 탕진하면서 우상화선전으로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를 극대화했던 해였습니다. 그 해에 북한 당국은 동상 건립을 김씨가문으로 확대하였습니다. 1968년에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의 동상이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에 세워졌고, 1974년 10월에는 김일성의 본처이자 김정일의 친모인 김정숙의 동상이 양강도 신파읍에 건립되었습니다. 김일성의 출생 60돌을 맞는 1972년 4월에는 평양시 모란봉기슭의 만수대언덕에 특대형의 김일성 동상과 항일투사들의 투쟁 모습을 형상한 군상, 조선혁명박물관이 세워졌습니다.

다른 나라의 국가수반들도 북한을 방문하면 만수대언덕에 올라 동상에 꽃다발을 증정하게 되는데 1980년대에 북한에 왔던 외국수반들이 이 동상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자기 나라에도 그런 동상을 세워 주기를 김일성에게 제의하였습니다. 당시 만수대창작사 조각창작가들이 수리아(시리아), 에티오피아 등 여러 나라들에서 파견되어 그 나라 국가수반의 동상을 세워주었습니다. 나라들마다 소문에 소문이 이어지면서 많은 나라들이 북한에 동상을 구경하러 올 정도였고 무상으로 다른 나라들에 동상을 세워주면서 북한 경제는 더 몰락해갔습니다. 당시의 북한의 이런 해외 동상제작을 전문가들은 ‘동상외교’라고도 표현합니다.

북한 당국은 1975년 10월에는 함경북도 온성군 왕재산에, 1979년 5월에는 양강도 삼지연군 삼지연못가에 김일성 동상을 세웠습니다. 해발 239m의 나지막한 언덕인 왕재산에 생겨난 동상은 주변에 왕재산혁명박물관과 답사숙영소와 함께 왕재산혁명사적지로 불립니다. 8,500㎡의 건평을 가진 3층 건물에 16개의 진열실로 이루어진 박물관은 1933년 3월 11일에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국내로 확대하기 위해 '왕재산 회의'를 열었다고 선전하지만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증언입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은 주체사상탑, 만수대예술극장, 개선문, 김일성경기장, 인민대학습당 등 대기념비 건립에 많은 자금을 들이면서 동상 건립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 88서울올립픽을 하면서 그에 대응하여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준비하면서 광복거리와 체육촌건설에 많은 투자를 하다보니 동상 건립에 돈을 투자할 수 없었습니다. 1988년에 국가안전보위부 본부 청사에 처음으로 김정일 동상이 세워졌으나 90년대 초에는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하면서 체제붕괴위기에 직면하였고,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동상 건립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 2월에 강건의 사망 50돌을 맞으며 강건종합군관학교에 강건 동상이 새로 건립되었고 김책 사망 70주년을 맞으며 김책공군대학에 김책 동상이 새로 세워졌습니다. 김정일의 투사 존중을 위한다는 ‘혁명적 의리’가 동상 건립을 통해 충성경쟁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사망하자 만수대언덕에 홀로 서있던 김일성 동상 옆에 김정일의 동상을 나란히 세워 자기의 정통성을 강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주민들도 김정은이 본처 자식이 아니라 첩이나 다름없는 재일본귀국자 출신의 무용배우 고영희의 아들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김정은과 북한당국은 수십, 수백 개의 동상을 더 세워 우상화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북한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인권 해방과 자유, 풍요로운 생활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에게서 나온 말이 “사상에서 밥이 나오냐”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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