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말로(13) -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김주원∙ 탈북자
202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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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말로(13) - 필리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전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
Photo courtesy of Wikipedia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들에서 설명한 것처럼 독재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마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은 1965년부터 1986년까지 21년 동안 독재정치로 필리핀 국민들의 삶을 여지없이 파괴했던, 필리핀 전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17 9 11일 필리핀의 북단 루손섬의 작은 소도시인 사라트에서 태어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정치가인 아버지의 권유로 필리핀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마르코스는 22살 나던 1939년에 아버지의 정치적 적수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상소하여 1년 뒤에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마르코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필리핀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당시 필리핀 대통령이었던 마누엘 로하스의 보좌관으로 발탁되면서 정치적인 야욕이 분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코스는 필리핀 자유당 소속 하원의원, 상원의원, 필리핀 수도 마닐라 시 시장직에도 당선되면서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40대 후반에 주요 정치경력을 거치면서 상원의장이 된 마르코스는 1965년에는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섰고 48살이 되던 그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마르코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집권 초기에는 경제발전, 정부개혁, 부정부패 척결 등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경제개혁들을 추진하였고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평등과 정의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왔던 필리핀의 대외정책은 마르코스 당선 이후에는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6·25 남침전쟁 시기에 미국과 함께 유엔군으로 참전할 정도로, 러시아나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는 적대적이었던 필리핀은 마르코스의 집권으로 반전되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으로 집권한 초기에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들의 높은 지지율을 얻은 마르코스는 1969년 대통령선거에서도 재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 선거공약과는 달리 필리핀의 경제는 더 악화되었고 개혁이 실패하면서 실망한 필리핀 국민들은 반정부, 반마르코스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마르코스는 1972 9월에포고령 1081를 발표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하여 반마르코스 성향의 정당 활동을 금지하도록 하였으며 반정부 인사들과 정치인들을 마구 체포, 투옥하였습니다. 살벌한 계엄령으로 필리핀의 정치, 군사, 사법 등 모든 분야를 거머쥔 마르코스는 부인과 일가친척들을 정치권과 경제의 주요직책에 앉혀 정치적 지반을 더 든든하게 하였습니다.

마르코스의 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는 1954년 필리핀에서 진행된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했던 미인이었습니다. 대통령인 마르코스의 힘을 입어 부인인 이멜다는 1975년에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 시 시장으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리고 1979년에는 주택환경부 장관직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장남인 봉봉 마르코스(Bongbong Marcos)도 대통령 보좌관을 맡도록 했고, 마르코스 자신은 1978년부터 총리직까지 겸임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노동당 총비서직에 국가주석을 겸했고, 부인 김성애를 조선여성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등용하여 인구 절반을 차지하는 북한여성들을 독재정권의 올가미로 옥죄였던 것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필리핀의 종교 지도자들과 지식인 학생들의 반정부 활동이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독재자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공포정치를 일삼는다는 것은 북한에서 정치범관리소를 운영하면서 공개처형을 노골적으로 강행하는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르코스는 영구적인 대통령 권한을 유지하기 위한 인신보호영장제도(人身保護令狀制度)를 신설하기도 했죠. 1981년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마르코스는 9년 동안 지속되었던 계엄령을 해제했으나 독재정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3 8 21일에 마르코스의 정치적 적수였던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quino) 전 상원의원이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1967년부터 1972년까지 필리핀 상원의원을 역임했던 아키노는 마르코스와 맞서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입국하였다가 암살당한 것입니다.

베니그노 아키노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경제개혁으로 국민들에게 더 좋은 삶을 제공하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권력유지에만 집중하면서 한때는 일본보다 더 부유하였던 필리핀의 경제는 점차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마르코스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와 차관을 문화센터 건설에 사용하는가 하면 스위스 은행에 개인구좌를 개설해 달러를 빼돌렸습니다. 마르코스가 21년 동안 집권하면서 부정축재한 재산이 약 10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33억 달러만 환수되었습니다.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김정은에게 물려준 비자금이 약 46억 달러라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일가족의 사치와 측근들의 충성을 독려하기 위한 선물정치를 위해 막대한 부를 탕진한 김씨 일가의 부정축재와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의 행태는 너무도 닮았습니다.

상원의원 베니그노 아키노의 암살과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정치, 경제파탄, 일가족의 부정축재가 밝혀지면서 필리핀 국민들의 민중항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군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려고 했습니다.

1986년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은 암살당한 상원의원 베니그노 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르코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친마르코스 세력과 반정부 코라손 아키노 지지세력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었고 유혈사태가 예상되는 초비상사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986 2 25일 미국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마르코스가 대통령 하야를 인정하고 망명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미국정부의 결정은 필리핀에서 독재정권을 끝장내고 유혈적인 국내전쟁을 막기 위한 최선의 평화전략이었습니다. 결국 마르코스는 21년 동안 지속해온 독재정치에서 물러나 미국정부의 주선으로 하와이로 망명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권좌에 올라 반대파 정치인들과 지식인,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장기집권을 꿈꾸었던 마르코스는 하와이에 망명한 뒤 3년 후인 1989 9 28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2세였습니다.

독재정권은 허물어졌으나 마르코스와 그 일가족의 부정축재에 대한 조사는 계속되었습니다. 2005 9 9일 필리핀 반부패 특별법원은 독재자 마르코스의 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에게 최고 징역형인 77년형을 선고했고 체포영장을 발부했습니다.

당시 법정에 증거물로 제출된 이멜다의 사치품들에는 그의 옷장에 보관된 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수천여 컬레의 구두와 고급 가죽손가방,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물들이 전시되었습니다.

영원한 독재정치로 대를 이은 세습을 꿈꾸었던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일가족의 운명은 국민들의 정의의 투쟁으로 막을 내렸지만 북한에서는 여전히 김씨 왕조의 독재정치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재의 끝은 언제나 무서운 철퇴였음을 김정은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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