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산혁명열사릉 (2)

김주원∙ 탈북자
201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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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혁명열사릉 앞에 김정은 위원장이 보낸 화환이 놓여 있다.
대성산혁명열사릉 앞에 김정은 위원장이 보낸 화환이 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지난시간에 대성산혁명열사릉이 세워지게 된 동기와 건축과정, 입구의 현판돌대문과 군상, 헌시비 등에 대해 얘기해드렸습니다. 오늘은 묘소에 들어서기에 앞서 화환과 헌화를 진정하는 화환진정대와 이 열사릉에 안치된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화환진정대는 100여개의 네모반듯한 검은색 옥석들을 경사지게 눕혀놓고 그 위에 구리로 만든 ‘공화국영웅메달’과 월계수를 형상하였습니다. 화환진정대의 크기는 공화국메달의 길이가 무려 4.3m, 너비가 2.8m나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월계수도 3개의 큰 목란꽃을 형상한 것인데 길이가 거의 5m가 되는 구리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화환진정대에서 화환이나 헌화를 놓고 잠시 묵상하고 난 뒤에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정해진 코스를 따라 순서대로 돌아보게 됩니다. 2시방향으로 건축된 열사릉 묘소는 현재 9개의 단으로 되어 있으며 매 단에는 15명에서 18명의 인물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각 묘소들은 청동으로 만든 흉상들이 비석대 우에 세워져 있으며 비석대 앞면에는 고인의 이름과 조선혁명군에서의 직위, 출생 연월일, 무장투쟁 시기와 사망 연월일, 간단한 경력 등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석대 밑에는 제사를 지내는 화강석 판돌이 있고 그 밑에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가장 위에 안치된 1단부터 내려오면서 매 묘소들을 둘러보게 되는데 16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에 대한 해설을 다 듣고나면 2시간은 더 지나갑니다. 해설사는 묘소가 안치된 순서나 방식에 대해 ‘사망한 날짜를 기준으로 안치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사망한 날짜와 함께 생존 시 직급과 김씨 일가에 대한 충성도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가장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15인의 묘소가 1단에 안치되어 있는데 중심에는 김일성의 본처이자 김정일의 친모(생모)인 김정숙의 묘소가, 그 왼쪽으로는 김책, 안길, 류경수, 김경석, 최용건, 최현, 김철호, 림춘추. 오른쪽으로는 강건, 최춘국, 오중흡, 최희숙, 김일, 오백룡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김정숙의 비석에는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1917년 12월 24일생, 1931년 9월 혁명에 참가, 1935년 9월 조선인민혁명군 입대, 1949년 9월 22일 서거’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합장된 최현과 김철호는 최룡해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부모들입니다. 이들은 김일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하여 항일투쟁을 하였고 1941년에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붉은군대 극동군 사령부소속의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해방 후에 귀국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김책은 소련군 88저격여단에서 정치부대대장을, 안길은 대대 군사정치위원, 최춘국과 최현은 소대장, 류경수는 저격수 등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오중흡은 김일성과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에서 복무하였는데 당시 그는 7련대장을 하였고 1939년 돈화현 륙과송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아직도 김일성과 이들이 소련군에 복무했던 사실을 북한주민들에게 숨기고 있습니다.

그 아랫단인 2단에 안치된 박영순, 지병학, 전문옥, 박길, 조명선, 서철, 김좌혁, 오재원, 정동철, 주도일, 태병렬도 소련극동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하였던 인물들입니다. 소련군 88저격여단 출신 박영순은 소련군 첩보부대에서 활동하였고 해방이 되어서도 1945년 11월에야 북한으로 귀국하여 당중앙위원회 통신부장 과 내각 체신상을 거쳐, 1971년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1973년에는 중앙혁명박물관 관장, 1980년 10월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88저격여단 소련군 출신 서철, 김좌혁은 해방 후에 김일성과 함께 귀국하여 서철은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 김좌혁은 김일성의 초대부관으로 활동하다가 당중앙위원회 검열부위원장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지병학, 조명선은 해방 후에도 중국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지휘관으로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가 1950년 6.25남침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4월에 인민군부대를 이끌고 귀국하였던 인물들입니다.

3번째 단상에 안치된 강상호, 리봉수, 김명숙, 전희, 오준순, 박두경, 최순산, 장철구, 김려중, 조정철, 한창봉, 심윤경, 오준옥, 김중동, 한익수, 전창철, 안정숙, 리두찬. 그리고 4번째 단상에 안치된 박락권, 김봉석, 심태산, 리철수, 최장만, 김만익, 김병수, 박장춘, 권영벽, 리제순, 박달, 리동걸, 지태환, 박길송, 김혁철, 지봉손 등도 김일성과 반일투쟁을 함께 하였던 인물들로 직접 산에서 싸운 사람들과 국내에서 지하공작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장철구는 1901년생으로 북한에서는 항일유격대 작식대원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평양상업대학이 그의 이름을 붙인 장철구대학으로 되면서 북한주민들 속에서는 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을 거라고 봅니다. 장철구는 1982년에 8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1970년대까지는 북한의 중앙기관과 여러 학교들에 다니면서 강연회를 통해 항일빨치산투쟁시기의 이야기를 자주 회상하군 하였습니다. 그리고 박달, 리제순, 권영벽은 북한주민들에게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을 정도로 회상기들에 많이 나오던 사람들입니다.

5단과 6단에 안치된 인물들 중에서 박록금, 오일남, 김학송, 김확실, 김진, 김주현, 마동희, 장길부, 박수만 등 36명도 청취자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사람들일 것입니다. 마동희는 김일성과 같은 연도인 1912년에 출생하여 항일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국내공작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일제에게 잡혀 희생된 인물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려고 자기의 이빨로 혀를 잘랐다는 내용이 북한영화와 회상기들에 등장하여 잘 알려졌습니다. 지금도 혜산시에 있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으로 올라가는 도로상에 당시 일제가 마동희를 쇠밧줄로 묶었던 나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1964년에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양강도 운흥군에 그의 동상을, 1975년에 혁명열사릉에 그의 반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90년 10월에는 청진교원대학을 마동희청년교원대학으로 개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아랫 단들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철주와 삼촌인 김형권, 그리고 김일성이 10대와 20대 초반에 함께 반일운동을 하였던 인물들을 안치하였습니다. 최창걸, 리광, 김혁, 차광수 등 수십 명의 소위 북한에서 말하는 ‘초기 공산주의 혁명가’들에 대해서는 북한 다부작 혁명영화 ‘조선의 별’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열사릉에 세워진 반신상들 중에서 초기혁명활동시기에 함께 싸웠다고 하는 이들에 대한 사진이나 인물자료가 부족해 동상창작가들이 어렵게 반신상을 제작했다는 이야기는 강연회에서도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항일혁명열사릉에는 부부합장묘에 묻힌 사람을 포함하여 160여 명이 묻혀있습니다. 그 중에 동북항일연군 출신이 135명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북한정권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던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이름대신에 조선인민혁명군, 혹은 항일유격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혁명활동시기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는 20대에 희생된 30여 명의 인물들은 지금도 북한의 청소년들에게 귀감으로 소개되어 그들을 따라 배우는 여러 가지 행사와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왕궁터인 안학궁이 자리한 평양시 대성산에 혁명열사릉이 건립되면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풍수를 잘 따지도록 지시했다는 사실도 비밀이 아닙니다. 열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평양시가와 김일성이 집무를 보았던 금수산의사당은 어찌보면 한 폭의 그림 같아 열사릉을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환성을 지르게 됩니다. 김일성은 살아 있을 때 자주 동북방향으로 바라보이는 열사릉과 거기에 안치된 본처 김정숙을 그리며 자주 회상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열사릉을 찾는 사람들에게 해설사가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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