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혁명열사릉

김주원∙ 탈북자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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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혁명열사릉과 신미리애국열사릉,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주민들이 화환을 놓고 있다.
대성산혁명열사릉과 신미리애국열사릉,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주민들이 화환을 놓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동포 여러분,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투쟁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죽으면 대성산혁명열사릉과 혜산혁명열사릉에 안치됩니다. 그런데 청취자여러분들 중에는 대성산혁명열사릉은 잘 알아도 혜산혁명열사릉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봅니다. 대성산혁명열사릉은 1954년에 김일성의 지시로 대성산의 미천호(美川湖) 부근에 처음으로 개장하였습니다. 6.25남침전쟁시기 죽은 김책을 비롯한 빨치산 출신 간부들의 시체를 한곳에 안장하여 국가적인 추모식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1959년 6월에 김일성은 해방 전에 항일투쟁을 하다가 중국에서 죽은 투사들의 시신을 넘겨오면서 임시로 양강도 혜산시에 안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양강도 혜산시 탑성동에 있는 혜산혁명열사릉입니다.

혜산혁명열사릉은 중국과 국경을 하고 있는 혜산국경세관까지의 거리가 2km도 안되는 연봉산 북쪽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85년에 친선다리라고 불리는 ‘혜산-장백다리’가 건설되어 이곳으로 교역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압록강 위에 가로질러간 공중 철근선을 따라 작은 배가 오갔습니다. 중국공산당에서 북한정권의 요청으로 찾은 투사들의 시신들을 보내면 이곳으로 넘겨져 와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연봉산자락인 이곳에 묻으면서 처음에는 혁명열사묘라고 불렀습니다.

중앙당 선전선동부와 조선노동당 당역사연구소에서 해마다 중국 동북지역에 나가 항일빨치산 사적지들을 발굴하면서 투사들의 묘소들을 중국공산당의 해당지역 당위원회의 도움으로 찾아내어 북한으로 보내져 혁명열사묘의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파가 북한의 주요직책들을 차지하면서 국내에서 반일운동을 했던 국내반일투사들도 이곳에 안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 안치할 묘소들이 많아지자 김일성은 1963년에 혜산혁명열사묘 개건확장공사를 진행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 졸업학년이었던 1963년 8월에 그를 데리고 양강도를 현지시찰하면서 이곳에도 들린 김일성은 묘역의 명칭을 ‘혜산혁명렬사묘’에서 ‘혜산혁명렬사릉’으로 개명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혜산혁명열사릉의 개건확장공사는 보천보전투 28돌이 되는 1965년 6월 4일에 끝나고 새로 건축한 추모탑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양강도 혜산시 탑성동에서 연봉산자락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혜산혁명열사릉은 압록강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1km정도이며 북쪽으로는 혜산농림대학과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혜산경기장이, 서쪽으로 약 700m에 양강도 도당위원회가, 남쪽으로는 혜산동물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사릉의 서쪽 120m의 거리에는 단독주택의 대남연락소 휴양소가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해외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북한으로 귀국한 대남연락소 소속의 공작원들이 여름이면 휴가차 백두산 답사를 왔다가 혜산에서 쉬고 가는 곳입니다. 혜산시 탑성동에서 살았던 일부 탈북민들은 왼팔에는 노동당 마크를 단 적위대복 차림의 이들이 울타리가 둘러막힌 휴양소 밖으로 외출하려고 나올 때가 있는데 하나같이 키도 크고 잘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사릉을 에워싸듯이 서남쪽으로 위치해 있는 독립전원주택들은 양강도 도당책임비서 사택을 비롯하여 조직비서, 선전비서, 근로단체비서 등 고위 간부들의 사택들입니다. 이 사택들은 24시간 무장을 한 보안원들이 근무를 서고 있으며 열사릉 주변에는 사복을 한 경호인원들이 항상 경계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혜산혁명열사릉의 부지면적은 약 8천여 평방미터이며 묘역의 정중앙에는 높이 3.6m,너비 1.2m, 두께 0.6m의 화강석 추모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추모탑의 앞면에는 ‘혁명렬사릉’이라는 글발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성스러운 항일투쟁에 한생을 바친 당신들의 불같은 애국의 넋은 조선인민의 심장속에 살아 불멸하리라”라는 추모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1967년 북한에서 소위 국내파숙청으로 박금철 부수상을 비롯한 국내파 항일투사 출신 간부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그들의 위상이 추락되었습니다.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사업을 시작한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국외에서 활동한 항일투사들과 국내에서 활동한 투사들을 분리해서 급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대성산 미천호 부근에 있던 열사묘소를 주작봉으로 옮겨 이곳에 1부류 투사들을 안치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결국 1973년 8월에 혜산혁명열사릉에 있던 묘소들 중에서 1부류에 속하는 소련군 88저격여단출신과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출신 투사들의 묘소는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이렇게 평양으로 이관하고 남은 묘소들은 현재 95기가 됩니다. 혜산혁명열사릉은 모두 7단으로 되어 있으며 매단은 12~14개의 묘소가 하나의 단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묘소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항일무장투쟁시기에 국내 투사들 중에서 해방 후에 생존하여 지방당 및 정권기관에서 고위간부로 활동한 자들 중에서도 1967년 종파숙청 때에 소위 종파활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해방 전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방과 북한 고산지대 북·중 국경지역에서 활동한 조국광복회 회원이거나 그 관련 하부조직에 소속되었던 투사들입니다.

대성산혁명열사릉은 화강석 묘비와 제사 판돌 밑에 시신을 안치하여 봉분이 없는 형태이지만 혜산혁명열사릉은 봉분 형태의 묘소입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출생 90돌이 되는 2002년에 혜산혁명열사릉의 묘소 비석을 새로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생일달인 그해 4월에 시작된 새로운 화강석 비석은 5개월이 지난 9월에 완성되어 세워졌습니다.

새로 세워진 화강석 비석은 지난 비석에 비하면 더 크고 비석 가운데에 돌사진을 만들어 넣은 것이 특이합니다. 돌비석은 검은색 돌을 쪼아서 사진을 만들었기에 절대로 변하지 않고 영구적으로 보존될 수 있습니다.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고 여름에는 영상 30도를 오르내리는 심한 기온차를 가진 양강도 날씨에도 변하지 말라고 이런 돌사진으로 비석을 하도록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비석돌 공사와 함께 돌계단을 대보수하고 바닥에 판석을 다시 교체하고 철근 울타리와 철 대문을 설치하는 작업 등의 열사릉 확장공사는 양강도 혁명전적지 보존사업소와 인민보안성이 맡았습니다.

공사가 끝나자 북한정권은 조선중앙방송을 비롯한 언론매체들을 통하여 “손에 무장을 들고 싸운 항일혁명투사와 반일애국열사들 95명의 유해를 안장한 혜산 혁명열사릉 묘비들에 돌(石)사진을 만들어 붙이는 사업이 성과적으로 끝났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혜산혁명열사릉이 김일성의 지시로 지난 1950년대 말에 건설되었고 1963년 8월에 김일성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김정일이 혁명열사묘라는 명칭을 혁명열사릉으로 고칠 것을 지시했다”고 전하면서 “양강도 혁명전적지보존사업소 일꾼들과 노동자들, 인민보안성 기술일꾼들이 새로운 화강석 비석 및 비석 받침돌 가공과 돌사진을 만들어 붙이는 작업, 계단 보수, 판석공사, 철대문 제작 설치 등 공사를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하였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혜산혁명열사릉에는 해마다 8월 15일이면 묘소에 안치된 투사들의 가족들이 찾아옵니다. 혁명 1세대인 투사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혁명투사 2세, 3세로 불리는 이들은 ‘백두산줄기’라는 덕택으로 여러 분야에서 실세를 행사하는 간부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항일투사 1부류인 대성산혁명열사릉의 자녀들보다 급이 낮은 2부류라는 이유로 불만을 품고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북한정권은 해방된 첫 시기부터 무계급사회를 만든다며 계급투쟁을 강조해왔고 지금은 북한사회가 평등사회라고 주장하지만 혁명열사릉은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성분토대가 좋아야 자녀들이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나쁘면 노동당에 입당할 수 없어 자식들에게도 노예와 같은 삶을 물려주어야 하는 북한사회는 세상에서 가장 낙후한 현대판노예왕족, 봉건독재국가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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