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동포 여러분, 사회주의 국가라고 자칭하는 북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조봉건왕조와 흡사한 현대판 봉건독재국가인 김씨왕조, 김일성이 만들었다고 하는 주체농법도 어찌 보면 이조시대 농사직설과 너무도 닮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옛 조선의 농사법인 농사직설과 북한의 주체농법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정초와 변효문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들고 조선의 풍토에 맞게 1429년에 간행한 농사법 참고서입니다.
농사직설이 중요한 농서(農書)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최초의 농사법 도서였기 때문이죠. 농사직설이 출간되기 전까지 농사법을 소개한 도서라고는 중국에서 편찬한 도서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책들은 중국의 농업환경에는 맞을지 몰라도 당시 조선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중국과 농사환경이 차이나는 현실에서 중국의 농법대로 농사를 지으니 농산물 수확량이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한 세종대왕은 1428년 4월에 경상도 감사에게 도 안의 지방관리들을 시켜 각 고을의 나이든 농부들을 직접 만나 잘못된 농사법을 알아내고 새로운 농사법을 찾도록 하라는 하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7월에는 전라도와 충청도에도 경상도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오랜 농사꾼들에게 농사법들을 조사하게 하여 그 자료들을 조정에 올려 보내도록 했죠. 각 지역에서 올라온 농사법 자료들을 취합할 데 대한 지시를 받은 정초와 변효문은 이 자료들을 정리하고 요약해 1년 만에 옛 조선의 최초 농사법 도서인 농사직설을 편찬해냈습니다.
세종실록 44권, 세종 11년인 1429년 5월 16일 기사에는 농사직설 서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문의 서두에는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저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노동당이 자주 강연회들에서 강조하던 문구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김일성이 해방 이후부터 이조실록을 손에 넣으려고 무진 애를 썼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6.25남침전쟁을 일으키고는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을 당시 서울 도심의 중심에 있던 조선시대 왕궁인 창덕궁에 보관되었던 이조실록들을 북한으로 가져갔다는 것은 지난시간들에 설명해드렸습니다.
이조실록은 한자로 되어 있어 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농사는 천하지 대본이며 모든 왕들은 이를 잘 알고 힘써왔사오며 세종대왕께서도 각 지역의 풍토가 달라 곡식을 심고 가꾸는 방법이 다를 터이니 각 도 감사들에게 명하사 지역의 오랜 농꾼들을 방문해 농토에 맞는 농사법을 조사케 하였노라’
‘신하 정초(鄭招)에게 명하사 이 조사에 대해 종부시 소윤(宗簿寺 少尹) 변효문(卞孝文)이 낱낱이 살피고 참고하여 중복(重複)된 것을 버리고 내용을 요약해 편찬하고 책이름을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고 하라고 명했노라’라는 내용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김일성에게 이조실록은 북한을 이조봉건시대 같은 현대판 봉건왕조국가로 만드는데 필요한 교본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의 장편소설인 총서 ‘불멸의 역사’ 중 ‘대박산마루’ 제30회에는 김일성이 1964년 ‘조선통사’를 출판하도록 했고 이어서 400권에 달하는 이조실록을 번역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김일성이 사망한 해인 1994년 12월 31일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간부들과 한 담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내 나라, 내 조국을 더욱 부강하게 하자’에서 한자를 잘 아는 홍기문 박사와 그 제자들이 있었기에 이조실록이 훌륭히 번역출판될 수 있었다고 강조했죠.
김일성과 김정일이 북한을 현대판 봉건왕조국가로 만들기 위해 수백 년 전에 존재한 이조봉건시기 왕들의 통치 수법을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이조왕조의 숙청수법을 그대로 본 따서 1950년대 초반에는 박헌영을 비롯한 남노당파들을 미국고용간첩으로 몰아 처형했고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에는 구소련과 중국 연안파를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에는 박금철을 주동으로 한 갑산파를 모조리 숙청하면서 그때부터는 북한을 이조봉건시기의 왕조독재국가를 능가하는 현대판 김씨왕조국가로 전락시켰습니다.
김씨왕조는 숙청수법만 이조왕조의 방식을 재현한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세종대왕에 의해 첫 농사법 도서인 농사직설이 출간되었다면,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의해 주체농법이 출현했던 것이죠.
북한에서 주체농법에 대한 언급은 1973년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유학을 했거나 일제치하에서 농사기술자로 종사한 농업 기술자들, 그리고 구소련과 중국 유학을 다녀온 농학자들이 서로 자기가 배워온 나라의 농사법을 주장하면서 농사방법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세종대왕이 각 도 감사를 내려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했듯이 농업과학자들을 농사현장에 파견해 농사방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했고, 1973년 1월 8일부터 9일까지 이틀 동안에 소집한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농촌경리를 더욱 강화 발전시킬 데 대한 과업을 제시했습니다.
김일성은 현실에 맞는 농작물 재배방법 연구를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에 지시했고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농업생물학과 엄녕섭 교수가 책임지고 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엄녕섭 교수가 책임지고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농업생물학과에서 연구해서 종합한 농법에 ‘주체’를 첨부해 ‘주체농법’이라고 명명하도록 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를 다녔던 저는 엄녕섭 교수로부터 농업생물과 식물생리학 과목을 배웠기에 이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북한 농업출판사에서 1992년에 출간한 도서 ‘우리나라 농촌문제 해결의 빛나는 경험’에는 ‘주체농법은 우리나라의 기후풍토와 농작물의 생물학적 특성에 맞게 농사를 과학기술적으로 짓는 과학농법이며 현대과학기술에 기초하여 농업생산을 고도로 집약화하는 집약농법이며 김일성에 의해 주체사상을 농업분야에 구현시킨 독창적이고 새로운 농사방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조봉건왕조가 세종대왕의 지시로 ‘농사직설’이라고 붙여진 농법 교범서를 전국 농민들에게 배포하였던 것처럼 북한에서도 주체농법을 각도 농촌경영위원회와 시군 농촌경리위원회, 리 협동농장괸리위원회에 내려 보냈습니다.
이조봉건시기에는 첫 농법 참고서인 농사직설이 출간된 이후에도 1492년에는 금양잡록(衿陽雜錄), 1655년에는 농가집성(農家集成), 1716년에는 산림경제(山林經濟), 1827년에는 임원경제지(林園十六志)가 출간되면서 시대발전에 따라 농법과 이에 따른 도서들도 새롭게 출간되어 농사발전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농업과학자 엄녕섭 박사의 연구팀이 연구한 농법을 김일성이 연구해서 내놓은 것이라며 주체농법으로 둔갑시켜 김씨왕조의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고집하고 있는 북한의 주체농법은 해마다 흉작을 가져오고 있으며 다락밭 조성으로 장마철 홍수 때마다 토량이 밀려 내려와 산은 민둥산으로 전락되고 있죠. 현대판 봉건왕조독재국가인 북한이 수백 년 전의 이조봉건시대보다 더 낙후한 반인륜적인 사회로 전락된 것은 우리 민족의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이예진,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