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시기, 스위스로 빼돌려진 김정은 형제

김주원∙ 탈북자
20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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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ungun_swiss_photo-620.jpg 김정은 제1위원장(빨간 원)이 스위스 유학시절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시간에 김정일이 본처인 김영숙 몰래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였던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와 초대소들에 동거하면서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2남 1녀를 보게 된 내용을 얘기해드렸습니다.

당시 김정은의 엄마인 고영희는 김정일에게 본처가 아닌 후궁, 현대말로는 첩에 불과한 존재였던 이유로 이들의 존재가 김일성에게 드러나는 것이 불편했던 김정일은 고영희와 세 자녀들을 초대소들에 숨겨놓고 생활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행군시기에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김정은과 형제들을 스위스로 유학을 보낸다는 이유로 빼돌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정은 형제, 특히 김정은이 북한을 출국해 스위스로 가게 된 경위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이전까지만 해도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의 존재는 국제사회에 알려졌지만 김정일이 그토록 숨겨놓았던 김정은 형제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08년 여름, 67살이었던 김정일이 뇌혈전으로 쓰러지면서 그해 9월 9일 건국 60돌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고 전 세계 언론은 독재국가인 북한의 새 지도자로 누가 될 것인가에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의사를 초청해 김정일의 치료를 했으나 잦은 재발로 그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급기야 그 다음해인 2009년에 들어서면서 고영희가 낳은 자녀 중 둘째 아들인 김정은을 자기의 후계자로 내세우게 됩니다.

김일성이 1994년 7월에 급사하면서 김정일에게는 너무도 신경을 써야 할 문제가 많아졌습니다. 러시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의 반란과 함경북도 주둔 6군단 고위군관들에 의한 6군단사건 그리고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의 자본주의로의 복귀로 인한 북한 인텔리들의 심리적 충격, 계속되는 큰물피해로 인한 흉년과 경제난 지속, 고난의 행군 등 북한사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탄을 안은 것 마냥 모순들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1994년 9월, 김일성이 죽고 나서 2달 후에 김정철을 스위스로 유학을 보낸 배경에는 김정일과 고영희가 만약 북한이 붕괴되고 인민들의 봉기로 저들의 신변에 위험이 닥쳐온다면 망명을 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먼저 빼돌리려 했다고 주장합니다.

김정은의 형인 김정철은 초급중학교 과정의 나이인 13살에 스위스로 유학을 가게 됩니다. 소학교 과정은 고영희가 자녀들에게 조선어 ‘가갸거겨(한글음절)’와 ‘구구표’를 집에서 가르치면서 외부와의 단절이 가능해졌습니다.

점차 커가면서 세계관이 형성되는 나이에 도달하면서 이들에게는 왜 친구들과 일반학교에 함께 다니지 못하고 외롭게 형제끼리만 생활해야 하는지 그리고 아버지라고 하는 김정일은 초대소들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지 않고 드물게 나타나 아빠행세를 하는지 그리고 엄마 고영희가 정실부인이 아니라 김정일에게 첩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 나이에 이르자 외국유학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고영희도 믿고 있었습니다.

당시 정실부인이 아닌, 숨겨진 채 김정일과 동거하는 첩의 신세였던 고영희에게 김정은 형제가 있다는 사실이 북한주민들에게 알려지면 김정일의 여성편력, 추한 이성행각이 드러나게 되겠기에 고위간부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인 금성중학교나 평양제1중학교에 보내기도 어려운 처지였던 것입니다.

지금 북한당국이 공개한 김정은에게 엄마인 고영희가 공부를 가르치는 사진이 바로 소학교 과정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던 김정은 형제의 당시의 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김정철은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 과정을 1994년 9월부터 1998년까지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스위스의 베른에 있는 베른국제학교에 다녔습니다. 세계적인 중립국으로 유명한 스위스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어 베른에는 많은 외국 대사관들이 있습니다. 외국대사관 자녀들이 공부하는 이 학교 학생 수는 약 300여 명이었으며 소학교부터 고급중학교 과정을 가르쳤습니다. 이 국제학교 1년 등록금은 1만 6천 파운드, 달러로는 약 3만 달러가 됩니다.

외국에 주재하고 있는 북한대사관인 경우에 대사의 1년 연봉이 1만 달러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 학교에는 발전도상나라나 북한처럼 가난한 나라의 대사관들에서는 자녀들을 입학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충성의 외화벌이’라는 명목으로 외화벌이 기관들과 무역기관들은 물론 일반 주민들에게마저 달러를 긁어모아 자기의 달러 돈주머니를 채우던 김정일에게는 이런 인민의 피땀이 스민 돈이 자기의 이성욕구를 위해 동거하는 고영희 사이에 생긴 김정은 형제에게 마구 써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습니다.

일본을 비롯한 외국 언론사 기자들이 재일교포출신인 고영희가 김정일의 눈에 들어 본처는 아니지만 이성생활의 동거자로 초대소에서 숨어 살면서 세 자녀를 낳았고 그 중 큰 아들인 김정철이 스위스 베른국제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내 취재를 하려 했고 관련 기사들이 서방언론들에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경제는 파괴되고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의 지원도, 중국정부의 원조도 적어지면서 김정일에게도 북한정권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김정은의 엄마인 고영희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아들인 김정철처럼 동생들인 정은이와 여정이도 스위스에 보내고 싶었던 고영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정일에게 졸라대 끝내 승인을 받았고 김정은과 김여정도 스위스로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형 김정철이 스위스에 유학을 온 지 2년이 되어오던 1996년 여름, 김정은과 김여정도 리철이라는 가명으로 삼촌 역을 한 북한 전 외무상 이수용과 신변보장을 위한 경호인원들과 함께 스위스에 도착해 형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 베른시 교외의 한적한 마을인 리베펠트에 도착해 형 정철과 상봉했습니다.

이곳에서 김정은 형제는 이모인 고영숙 부부가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1998년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김정은과 김여정은 형이 다닌 베른국제학교 대신 사람들의 눈길이 덜 미치는 학교에 보내졌습니다.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김정은은 ‘박운’이라는 가명으로 베른에 있는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 김여정은 헤스구트 공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98년에 스위스에서 김정은 형제를 돌보던 이모 고영숙 부부는 망명하기 전까지 김정은의 아빠, 엄마로 행세했습니다. 김정은이 박운이라는 가명을 썼기에 이모부 리강은 북한대사관 외교관으로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사용하였고 이름도 박남철이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물론 이모 고영숙도 본명 대신 정용혜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당시 김정은 형제가 거처해있던 건물은 3층짜리 주택이었는데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당국이 1989년에 400만 프랑으로 이 건물의 6세대 분의 아파트 살림집을 구입해서 사용했습니다. 독일 고급승용차인 벤츠를 거의 100대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렇듯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시기에 김정은 형제들을 스위스로 보내 공부를 하도록 했지만 최근에도 북한당국은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시기 인민들과 똑같은 어려운 생활을 겪었다고 거짓 선전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미국 등 전 세계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북한을 지원해 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난 뒤 고난의 행군은 좀 나아졌고 김정은 형제는 다시 북한으로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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