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의 흑막

김주원∙ 탈북자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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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_namki_b 사진은 2010년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자로 몰려 총살된 북한의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왼쪽).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2009년 12월에 있었던 화폐교환사업(제5차 화폐개혁)은 그해 2월에 북한주민들에게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표된 김정은의 업적쌓기 일환으로  강행된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당국은 당시 화폐교환사업의 실패를 당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장이었던 박남기에게 돌려 숙청했습니다. 오늘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북한당국이 강행한 화폐교환사업의 뒤에 숨겨진 흑막을 파헤쳐보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김정일은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과 윁남에서 했던 시장경제 방식을 도입해서라도 경제를 활성화하려고 이 나라들에 일꾼들을 파견했습니다. 1990년대 말에 이르러 고난의 행군으로 지방도시들에서는 간신히 이어오던 배급제도 완전히 마비되었고 전력부족으로 공장들은 가동을 멈추었습니다. 주민들은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장마당 장사와 달리기 장사, 텃밭 농사 등 개인 경제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도시들에서는 개인들이 운영하는 협동식당들도 더 많아졌습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모방한 이러한 개인 경제활동들이 활발해지면서 국가기능은 더 마비되었고 동유럽국가들처럼 자본주의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보위사령부에 ‘총소리를 내도 좋다’는 지시를 하달해 1998년부터 2000년 사이에 청진시, 혜산시, 남포시 등 북한의 주요도시들에서는 보위사령부 검열로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아무리 공개처형을 하면서 주민들에게 공포를 주어도 생사를 건 주민들의 개인경제활동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돈이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조선중앙은행과 지방은행들의 화폐는 고갈되었습니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이 자본주의로 복귀되면서 지난시기에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반납하라고 독촉했고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면서 수출을 통한 외자벌이도 어려워졌습니다.

북한당국은 중국의 개혁개방정책과 윁남의 경제개혁방식인 도이머이 정책의 경험을 토대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일정한 범위를 허용하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를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7.1경제관리 개선조치로 공장에 출근하지 않고 개인장사를 하던 북한주민들을 다시 공장에 출근하도록 해 경제를 회복하려는 것이 당시 김정일의 구상이었습니다.

7.1경제관리 개선조치로 물가는 평균 25배로 인상되었고 대신 노임도 약 18배로 인상되었습니다. 150원 미만의 노임을 받던 노동자들의 노임이 평균 2천원 정도로 올랐지만 물가가 더 인상되다보니 살아가기는 더 어려웠습니다.

국가계획위원회의 일관적인 지시로 진행되던 모든 경제활동이 지표별 계획에서 액상 계획으로 전환되었고 독립채산제가 강화되면서 기업소가 자체적으로 자재를 구입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곡식이나 남새 등 농토산물들만 팔던 기존의 농민시장이 공업품들도 판매하면서 품목들이 다양해졌고 이름도 종합시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하여 물가와 노임이 대폭 인상되었고 화폐의 유통량이 급증하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인플레이션이 7년 동안 계속되면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로 북한경제를 정상으로 복귀시키고 계획경제의 회복을 꾀했던 북한당국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주민들이 장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문제는 김정일의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은은 처음부터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파괴된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서 자구책이 개인들에게 집중되어 국가경제운영을 하려고 해도 돈이 돌지 않아 이것을 타파하려면 화폐교환으로 개인들의 수중에 있는 돈을 국가 수중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09년 2월에 유일한 후계자로 된 김정은의 업적을 만들기 위한 150일 전투가 4월에 시작되었고 이를 연장해 100일 전투를 했지만 화폐가 개인들의 수중에 있다 보니, 그리고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해서 버는 노임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 장사를 해야만 했던 북한주민들이 국가 일에 열성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김정은의 지시로 북한당국은 제3방송을 통해 2009년 11월 30일 오전 10시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과 내각 결정 423호 “새 돈을 발행함에 대하여”를 공표하여 화폐교환사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당시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정전으로 화폐교환소식을 접하지 못한 주민들도 있었습니다.

화폐교환은 12월 2일부터 6일까지 약 일주일간 전국적으로 진행되었고 당시 북한당국은 화폐교환 목적을 ‘화폐제도를 강화하고, 화폐유통을 공고히 함으로써 경제강국 건설을 다그치고, 근로자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생활안정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일부지역 당위원회들에서는 새로 후계자로 된 김정은이 ‘전체 인민을 골고루 잘 살게 하려고 화폐교환사업을 몸소 발기했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화폐교환의 목적은 개인들의 수중에 있는 돈을 빼앗아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국가경제건설 재원을 마련하고 주민들의 시장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북한의 경제흐름을 다시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회귀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결국 김정은의 후계세습과정이 경제적으로 안정하게 진행되도록 하고 업적쌓기를 위한 선전선동의 극대화도 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강행한 2009년 화폐교환사업은 북한사회 전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북한당국은 화폐교환비율을 100대 1로 정하고 한 가구당 구화폐 10만원이라는 교환한도를 제시했습니다. 안정적인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 확립, 통화조절을 통한 물가 안정, 신흥부자들에 대한 견제 등의 목적으로 추진된 화폐교환사업은  북한 주민의 경제활동에 많은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10만원이 초과된 구화폐에 대해서는 화폐교환 대신에 국가가 1000대 1의 비율로 은행에 저금하도록 강요하자 남의 돈을 빌려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사이에 빚더미 위에 올라앉는 신세가 되었고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싸움들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고 북한 전역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김정은의 첫 후계자 등장과 함께 화폐교환사업을 통해 자기의 업적을 과시하려던 것과는 반대로 그에게 들이 닥친 현실은 엄혹했습니다. 북한당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배려금’이라며 1인당 신권 500원을 추가로 배분하여 주민들의 분노를 안정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연회와 해설담화를 통해 충분한 재화의 공급을 약속하면서 주민을 회유하였습니다.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무질서가 만연해지자 북한당국은 최악의 경우에는 ‘총살에 처한다’는 표현이 들어간 포고문을 발표해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폐교환사업의 실패를 당시 중앙당 계획재정부장인 박남기에게 돌려 숙청하였고 강연회에서 이런 내용을 선전하면서 김정은의 지시로 화폐교환사업이 강행된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고위간부들은 화폐교환사업의 흑막을 잘 알고 있었고 미리 북한화폐를 달러나 중국 위안화로 바꾸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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