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의 정치화

김주원· 탈북자
2019-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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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그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 그림.
사진-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당국은 해방 후 처음에는 정치라는 말보다 문화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군부대 내에 정치부장, 정치지도원 등으로 불리는 당일꾼들이 문화부장, 문화부중대장 등으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북한에서 문화예술은 단순히 문학과 예술의 경지를 벗어나 사람들에게 사상을 주입하고 당과 국가에 순응하는 피동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한 사상선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한자로 다스린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는 정치라는 용어보다 처음에는 문화라는 온화한 말로 사람들을 기만한 셈입니다. 김일성이 1946년 5월에 한 연설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에서 투사가 되어야 한다’의 내용을 보면 북한당국이 문화예술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에서는 문화예술에 정치적인 색깔을 입히지 않지만 북한만 모든 문화예술에 김씨일가에게 충성하도록 사상을 주입합니다. 그리고는 다른 나라의 문화예술을 퇴폐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한국영화나 외국영화들이 더 인기가 있는 이유는 북한영화들은 김정은과 노동당에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들이 포함된 것과는 달리 인간의 본능과 실제의 생활을 진솔하게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해 인민정권과 3대혁명을 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북한당국이 말하는 인민은 일당독재의 우두머리인 수령에 대한 우상화선전으로 세뇌되어 노예적인 사고의식을 가진 몽매한 군중을 뜻하며 3대혁명은 사상, 기술, 문화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구호가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입니다. 북한에서 강조하는 주체는 다른 나라의 것이 아닌 북한의 것만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결국 사회생활의 전반이 외부와 단절되고 폐쇄되어 정치화 되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1967년 박금철 부수상을 비롯한 국내파 고위간부들이 종파로 몰려 숙청되었습니다. 당시 박금철은 중앙당선전선동부장이었던 김도만에게 자기의 혁명활동 업적을 선전하는 연극인 ‘일편단심’을 창작하도록 하였습니다. 연극 ‘일편단심’의 내용은 일제강점기에 박금철 부수상이 반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부인이 남편인 자기에 대해 충성을 다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연극도 숙청이유의 한가지로 지목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근무하였던 김정일은v연극이나 가극 등을 통해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영감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박금철이 자기의 부인을 혁명가의 아내로 연극을 통해 내세운 것처럼 김정일은 생모인 김정숙에 대해 ‘조선의 어머니’로 둔갑시켜 문화예술작품들에 등장시켰습니다.

그때부터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모습이 미술작품들에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북한주민들 속에게 김정숙의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미술작품과 공연예술작품들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정숙의 생가를 회령시 오산덕에 복원하도록 하였고 1969년 9월 22일에 이곳에 김정숙의 동상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에 의해 김정숙의 생일인 12월 24일에 북한 전역에서 충성의 노래모임이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백두혈통에 대한 우상화선전이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문화예술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 하는 것은 해방 후 첫 문화인대회였던 ‘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선전원, 문화인, 예술인 대회’에서 한 연설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의 투사로 되어야 한다’의 내용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연설에서 “우리가 반동세력을 분쇄하고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은 동무들이 문화전선에서 잘 싸우는가 못 싸우는가에 달려있습니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문맹자가 많았던 상황에서 학습제강보다 노래나 연극, 영화를 통해 대중을 선동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1949년에 처음으로 제작된 영화 ‘내고향’에 이어 ‘용광로’ 등 수령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들이 제작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인민대중은 문화와 예술의 창조자이며 향유자이다’라는 구호를 제시하여 주민들에 대한 군중문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순회극단, 이동영사대, 이동예술대, 가창대 등 다양한 형식의 선전선동활동들이 등장하였고 6.25전쟁으로 문화시설이 파괴되자 북한 전역에 반항공시설을 갖춘 지하공연장들이 건설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극장이 평양시 만수대언덕에 있는 평양모란봉지하극장입니다.

1959년에 북한당국은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설립하고 동상제작과 김일성을 형상한 미술작품들을 제작하는 미술창작기지인 ‘만수대창작사’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민배우와 공훈배우 명칭을 새로 내와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실시하도록 하였고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난시기 문화예술분야에서 중시되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맑스-레닌주의)적 입장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김일성의 항일혁명투쟁을 중시하는 ‘항일혁명문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문화예술작품들이 예술성과 기량성보다 정치성과 사상성에 의해 평가되었고 문화예술인들은 ‘당정책을 무조건 지지옹호하는 견결한 입장’을 견지할 것을 강요당하였습니다.

1960년대에 북한당국은 문화정책에서 ‘군중문화’를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하였습니다. 모든 예술작품들에 대한 중앙당 선전선동부의 검열통제가 강화되었습니다.

1961년 6월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새환경에 적응하게 문화 및 대중정치사업에 대한 지도체계를 일부 개편하여 기구정원을 조절할 데 대하여’가 결의안으로 통과되었고 1962년 1월에는 내각결정 제6호로 ‘군중문화사업과 대중정치사업을 개선강화할 데 관하여’가 의결되었던 것입니다.

1960년대 말에 북한당국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시기에 창작한 연극인 ‘혈해(血海)’를 바탕으로 혁명가극 ‘피바다’를 새로운 형식으로 창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피바다식 혁명가극’ 창작이라는 구호아래 5대 혁명가극인 ‘꽃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가 창작되었습니다.

북한당국은 문화예술정책에서 ‘사회주의적 민족문화’노선을 강조하였고 김정일에 의해 문화예술의 정치사상화가 사상개조와 사상투쟁이라는 형식으로 추진되었습니다.

1980년대 ‘당중앙’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후계자로 공식 등장한 김정일은 ‘문학예술혁명’을 강조하였고 북한당국은 이 시기를 ‘주체문학예술의 대전성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문화예술분야에 주체가 도입되면서 ‘주체미학관’, ‘주체음악론’, ‘주체문예이론’ 등 다양한 용어들도 등장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지시로 ‘문학예술창작의 군중화’ 방침관철을 제시하였습니다. 1982년 11월에 진행된 전국문학통신원열성자회의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 ‘문학예술활동을 대중화할 데 대한 당의 방침관철에서 문학통신원들의 역할을 높이자’에서 문학예술창작의 군중화 방침관철이 강조되었고 4.15 창작단 등 전문창작단들의 문학예술창작을 집체화할 데 대한 과업이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199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이 붕괴되자 체제붕괴위협을 느낀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내세우면서 ‘선군문예정책’을 강조하였습니다. 지구상에 유일한 문화예술의 정치화로 인민들의 사상의식을 마비시켜 김정은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북한문화예술의 반인민성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 확신하며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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