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우 사령과 구국군별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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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김일성이 중국인 반일구국군 부대 지휘관인 우 사령 부대에 찾아갔던 이야기와 우 사령 부대 소속의 ‘구국군별동대’로 활동할 수 있게 허락을 받고 공산당을 싫어하는 중국인 반일부대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항일투쟁을 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고록 2권 6장 ‘시련의 해’, 6절 ‘구국군과 함께’에서는 “김일성이 중국인 구국군 부대인 우 사령 부대에 찾아가서 담판을 잘하여 별동대를 조직하였고 무장해결을 위해 통화지방에 본부를 두고 있는 당취오자위군과도 반일공동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구국군 별동대가 안도를 떠날 때에는 40여 명이었으나 점차 인원이 늘어나 150명으로 불었고 당시 연길과 훈춘에 생겼던 100명 규모의 유격대보다도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론 20명도 안 되는 패거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고록에는 김일성이 우 사령 부대를 찾아가게 되었던 계기는 자기의 결심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서기였던 동장영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도 역시 숨기고 있습니다.

당시 소왕청에 본거지를 둔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가 조직한 군사강습에 참가했던 김일성은 동만특위 서기 동장영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동장영이 김일성에게 “구국군이 조만간 안도를 공격하게 되고 우명진 사령의 부대도 우리 구국군과 합작하고 함께 행동하기로 했다”며 우 사령을 만나도록 지시합니다.

우 사령을 만난 김일성이 처음에는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하였다가 “어느 군사학교를 나왔냐”는 질문으로 인해 중국인이 아닌 것이 들통나게 되는데 우 사령이 “왜 꼬리빵즈면서도 중국사람인척 했느냐?”라는 질문에 김일성은 “사령관님이 꼬리빵즈라면 몹시 미워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변명하였습니다.

꼬리빵즈라는 말은 중국인들이 조선사람들을 비하해서 말하는 욕설같은 용어입니다. 본명 김성주로 불리던 김일성이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는 우명진 사령은 “중국인으로 가장하려 했던 것은 용서하겠지만 공산당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똑바로 밝히라”고 강요하게 됩니다.

김일성은 이미 중국 사람인 척하다가 들킨 마당에 공산당원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우 사령이 어떻게 나올지 두려움이 앞서 “내가 조선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은 절대 아닙니다. 나는 조선혁명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조선혁명군은 1929년 5월 남만주 일대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독립군들이 세운 국민부 산하 정규군으로 사령관은 이준식, 제1중대장은 양세봉, 제2중대장은 윤환 등이 임명되었던 약 1만 명 병력을 가진 조선인 독립군 부대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우 사령관에게 “사령관님 부친께서 공산당이 일으킨 폭동 때 조선 사람에게 끌려 나가 피해를 보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공부를 못한 농민들이고 공산당에게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조선 사람을 다 나쁘게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저처럼 사령관님을 좋아하고 숭배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라며 설득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우 사령을 우상 섬기듯 하면서 설득하자 우 사령도 마음이 어느 정도 움직이게 되었고 “네가 공산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면 그때 내가 다시 생각해보겠다”며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패거리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중국인 지주들인 목한장, 장홍천, 쌍병준 등을 불러들여 사실 확인을 하였습니다.

우 사령은 “여러분들은 김성주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소? 그가 공산당이 맞소? 아니오?”라며 물었고 중국인 지주 장홍천이 “안도 바닥에서 그자가 공산당이 아니면 누가 공산당이겠습니까? 그자야 말로 제일 새빨간 공산당입니다. 사령관님께서는 꼭 우리 분을 풀어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여러분을 많이 괴롭혔습니까?”’라는 우 사령의 물음에 그들은 “네. 공산당이 아니고서야, 우리 지주 집을 습격하겠습니까!”라며 오히려 반문하였습니다.

우 사령은 “고약한 자식이 나한테는 끝까지 공산당이 아니라고 잡아떼더란 말이요”라고 말하며 부하들을 보내 김일성을 잡아들였습니다.

우 사령은 붙잡혀 온 김일성에게 “엊그저께는 내가 미처 모르고 그냥 놓아 보냈다만, 다시 알아보니 네가 아주 대단한 자로구나. 너야말로 부자 곡간에 불을 지르고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뻘의 연세 있는 어른들을 길바닥으로 끌어내 머슴과 하인들 보는 앞에서 개 패듯 패고 세상에 못 할 짓이란 못 할 짓은 다 하고 다녔던 나쁜 놈 우두머리였구나. 나이도 어린놈이 어떻게 그렇게 지독하게 나쁜 짓들만 골라하고 다녔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우명진은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거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는 주마”라고 말하자 김일성은 “사령관님, 제가 그렇게 사람 죽이고 불 지르는 악마였다면, 사령관님께 저를 모함하던 사람들 몸에서 사지 어디가 떨어져 나간 데라도 있었습니까? 아니면 얼굴 어디에 생채기 하나라도 나 있는 걸 보셨습니까?”라며 변명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나를 제일 헐뜯은 사람은 쌍병준 어른 아닙니까? 그분은 사령관님께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동무들이 그분 집에 가서 총을 빌린 적이 있지만 빼앗지 않았습니다. 차용증을 써주고 빌린 총이고 고장 나면 후에 돈으로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라며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총으로 왜놈들과 싸워 이긴 다음 언젠가는 반드시 돌려드리거나, 총이 고장 나서 더는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면 돈으로 갚아주겠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 어른은 차용증을 받은 이야기는 왜 사령관님께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에 우명진은 몹시 어리둥절했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소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총을 빼앗은 것이 아니고 차용증을 써주고 빌렸다는 것과 차용증에 왜놈들을 몰아낸 다음 총을 되돌려준다는 내용을 썼다는 말에 부쩍 호기심이 동했고 결국 쌍병준까지 다시 우명진 앞에 불러와 김성주와 대질하게 했습니다.

결국 우 사령은 김일성의 말에 넘어갔고 “네가 내 별동대가 되겠다는 데는 동의한다”며 필요하다면 총과 탄약도 대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 사령 부대 이름을 내걸고 별동대를 조직하는 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공산당과는 관계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우 사령과 담판을 하여 구국군 부대를 내오게 되고 그때부터 중국인 반일부대에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고백하고 있으나, 비굴하게 우 사령에게 구걸하여 별동대를 만들었던 과정에 대해서는 숨기고 있기에 처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실 거라고 봅니다.

김일성은 우 사령의 조건부대로 아무런 주저도 없이 “우리가 사령관님의 별동대가 되고 나면 언제나 사령관님의 지시만 받으면서 활동할 것인데, 공산당과 다시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까”라며 우 사령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우명진은 김일성이 진심으로 자기를 따른다고 믿게 되자 몹시 흡족해했습니다. 그리고 별동대를 설립하는 날에 참모장인 유본초(劉本初)도 부대로 돌아왔는데 그는 길림육문중학교에서 본명 김성주였던 김일성에게 한문을 가르쳤던 교사였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우 사령 부대와의 담판에서 유본초의 영향이 컸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유본초가 다른 곳에 나가서 활동하던 때였고 김일성이 공산당과 인연을 끊고 우 사령에게 충성하겠다는 맹세를 하였기에 우 사령부대의 별동대로 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유본초는 “나는 김일성이라는 빨갱이가 사령관님한테 몇 번 왔다 갔다 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게 성주 너일 줄은 미처 몰랐구나. 네가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꿨단 말이냐?”라며 놀랐다고 합니다.

처음에 김일성의 우 사령 구국군 별동대는 30여 명이었으나 길회선 철도를 파괴하라는 우 사령의 임무를 받고 흑석령(黑石嶺)에 매복한 일본군 다노(田野) 여단의 한 중대와 부딪쳐 대원 10여 명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마록구(馬鹿溝)에서 다시 모였을 당시 남은 인원은 19명이었고 이것은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오늘 방송을 들으면서 1%의 사실에 99%의 거짓으로 엮어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가짜역사도서라고 말하는 이유를 더 잘 알게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