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현묵관과 김성주

평남 문덕군 선거자들과의 상봉 모임에서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는 김일성 주석 화보 자료.
평남 문덕군 선거자들과의 상봉 모임에서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는 김일성 주석 화보 자료.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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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17살 되던 김일성 즉 당시의 김성주가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홍경현 왕청문에 갔다가 당시 독립군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던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현묵관을 만났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1권 3장 ‘길림시절’, 9절 ‘왕청문의 교훈’에서 “나는 도착하자마자 현묵관을 찾아갔다. 현묵관은 국민부가 나온 후부터 길림에 있지 않고 왕청문에 와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국민부 본부가 성주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으니 이번 대회에서 한몫 단단히 하라”며 회의 기간에 자기 집에 숙소를 정하라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현묵관은 20대의 끌끌한 유학파 출신 청년들과 독립군에서 일제와 싸운 경험이 있는 애국청년들에 관심이 있었을 뿐, 어린 김일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당시목격자들의 증언입니다.

1929년 11월 18일에 발표된 남만청총대회의 결의안에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최창걸이, 상무집행위원으로는 고이허, 차광수, 계영춘, 박성일, 김수산, 김혁이 선출되었지만 김성주는 그 어떤 직책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민족주의를 중시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던 국민부는 공산주의운동을 막고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청년들을 규합하여, 반일운동을 벌여 조선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남만총청대회를 열었고 김일성도 상관인 이종락과 국민부의 편에 있었지만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이 사건을 두고 국민부를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29년 가을부터 1930년 5월까지 길림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고 했지만 1929년 11월에 열린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에 불과합니다.

남만청총대회 이후 동생 김철주가 형 김일성을 찾아와 어머니 강반석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해주었고 차광수가 준 돈으로 좁쌀 한말을 사가지고 어머니를 찾아 떠났던 내용은 회고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본명 김성주였던 김일성과 동생 김철주 사이에 현묵관에 대한 이야기와 공산주의에 대한 의견을 나눈 이야기는 회고록에도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내용은 김철주가 죽기 전에 그때의 형과의 대화내용을 이야기 한 것이 후에 공개되어 재미교포 유순호가 쓴 ‘김일성평전’에 밝혀지면서 그 전말이 드러났습니다.

김일성은 형처럼 공산주의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동생 김철주에게 반공독립군부대인 우사령부대의 별동대로 활동하는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형이 지금 구국군별동대가 된 것만 봐도 모르겠니? 형은 정의부에도 참가하고 또 공산당에도 참가하고 있다. 이번에 잘하면 다시 양세봉 아저씨네 조선혁명군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말했습니다.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이었던 현묵관이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김일성이 다시 양세봉 부대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강반석은 현묵관과 양세봉의 근황에 대해 물었습니다.

김일성은 강반석에게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간부들이 만주사변 후의 형세를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하려고 신빈현에서 회의하고 있었는데, 그곳 친일주구단체인 보민회가 이 정보를 알고 일본영사관에 밀고했다고 합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이었던 현묵관 아저씨가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그 이후에 조선혁명군 사령관이 되었던 김관웅, 장세웅 같은 분들도 모두 붙잡혔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양세봉 아저씨 한 분만 남아서 혁명군을 이끄는 중이니 양세봉 아저씨가 결코 저를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지금 혼자가 아니고 무장을 한 구국군별동대로 활동하고 있고 그들을 데리고 가니 양 사령도 받아주실꺼예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이었던 현묵관이 공산주의자로 자처하던 차광수와 김일성을 싫어했다는 것을 잘 아는 강반석은 아들 김일성에게 “성주야. 그래도 현묵관 그 사람이 너희들을 해치려 했다는 말은 나도 좀 얻어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은 웃으면서 “제가 공산주의자가 되니까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어머니 앞이니 제가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도 공산주의를 잘 모릅니다. 솔직히 작년과 재작년에 발생한 폭동들을 경험하면서 정말 이런 것이 공산주의라면 이 공산주의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도 많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작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라면 이를 갈고 치를 떠는 현묵관 아저씨를 정말 미워했는데, 그 아저씨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니 마음이 바뀝디다. 더구나 이번에 우 사령관 부대와 접촉하면서 중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도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강반석은 “성주야, 그렇다면 너도 어서 공산주의에서 손을 떼야 할 것 아니겠느냐? 나도 성경책까지 다 집어던지고 그 사람들 모임에 나갔다. 이제는 열성분자 소리까지 들을 지경이 되었지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거니와 또 마음에 들지도 않는구나. 네가 이번에 양세봉 사령관과 만나 그분의 용서를 구하고 네 동무들까지 모두 조선혁명군이 된다면 나도 한시름 놓겠다. 나는 더 이상 네가 중국 사람들의 별동대장이 되어서 돌아다니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김일성은 어머니를 안심시키면서 “어머니, 통화에 도착할 때까지만 계속 우 사령관의 구국군별동대로 활동하고 양세봉 아저씨를 만나면 바로 조선혁명군에 참가하겠습니다. 제가 정의부에도 참가하고 공산당에도 참가하고 또 우 사령관의 별동대가 된 것이 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저에게는 공산주의도 구국군도 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일성과 강반석 사이에 오간 대화 속의 현묵관은 1890년에 평북 박천군에서 태어난 독립활동가 현익철의 별명입니다. 그는 29살되던 1919년에 평안북도에서 북간도로 가서 좌진의 독립군에 들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반일항전에 뛰어들었습니다.

1931년 7월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맡았던 현묵관은 심양에서 한중연합투쟁을 위해 회의를 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5년만에 병보석으로 투옥되어 상해임시정부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암살범의 총탄에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밝힐 수 없는 반일애국투사들의 한생을 들여다 보느라면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그들의 업적을 지워서라도 김씨 왕조를 지속하려는 북한 선전선동의 민낯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