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5개년 계획의 진실

김주원∙ 탈북자
2020.03.11
nk_train_people_b 기차가 평양 교외를 지나가는 모습.
/AFP

북녘 동포 여러분, 전후 1954년과 1955년, 1956년, 3년에 걸치는 3개년 계획을 진행하면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로부터 제공된 원조로 전후복구건설을 진행하면서 원조의 덕을 톡톡히 본 김일성은 1956년 4월 23일-29일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1957년부터 1961년까지 5년 동안 제1차 5개년 인민경제 발전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당대회에서 김일성이 1차 5개년 계획에서 제시한 과제는 ‘농업의 협동화와 개인적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끝내고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토대를 구축하며 인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련의 국가경제계획을 통제하던 소련국가계획위원회인 고스플란은 북한당국이 세운 제1차 5개년 계획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원조를 받는데 근거하여 계획을 세우다보니 비현실적이었고 그로 인해 산업 부문 간 균형이 파괴되었습니다. 부풀려진 계획목표 달성을 위해 해당 부서들과 기관기업소들은 그에 따른 노동력의 규모를 늘려야 했습니다.

북한당국은 1957년에 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할 수 없어 1958년 3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제1차 노동당 대표자회의를 진행하면서 그때에야 비로소 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9년 6월말까지 공업부문에서 생산품은 목표를 달성하였고 그해 12월말에는 5개년 계획이 완성되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결국 5개년 계획이 채택되고 나서 1년 반 만에 완성된 셈이었습니다.

북한의 전후복구건설 수행과 1차 5개년 계획 달성을 위해 소련의 원조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기에 북한당국은 인민경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소련당국과 논의하였습니다. 1957년 7월에 소련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의 무리한 원조요구에 소련정부는 노골적으로 부담감을 표출하였습니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흐루시초프가 1인자라면 소련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아나스타스 호바네시 미코얀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작성한 제1차 5개년 계획에 대해 현실적이지 못하며 달성하기 어렵다고 비난하였고 이미 제공된 차관에 대해서도 제때에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동유럽 방문 이후 소련당국과의 회담에서 방문기간에 요구했던 원조요청을 되풀이했습니다. 소련정부는 북한이 요구하는 원조를 차관형식으로 바꾸어 제공할 것임을 결정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요청한 원조 중에는 25만 톤의 식량과 5만 톤의 설탕, 2만 톤의 식용유도 들어있었습니다.

소련정부의 대북차관의 규모는 1956년 8월 30일에 김일성이 한 연설문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총 지원액은 4억 7천만 루블에 달할 것이며 그 중 3억 루블은 무상원조 형태로, 1억 7천만 루블은 차관형태로 제공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소련으로부터 철기, 직물, 면사, 쌀, 빠다(버터), 설탕, 케이블, 차량, 트랙터, 목재 등을 얻을 것이며 이 외에도 소련은 목재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극동 지역의 목재를 우리에게 제공하게 될 것이다. 소련정부는 겨울철 어획량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약속했으며 농업, 어업, 과학기술위원회와 흥남 비료연합기업소 수리를 돕기 위한 기술자들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또한, 이전의 차관 금액에서 5억 7천만 루블은 상환을 면제해 주었으며, 3억 6,200만 루블의 잔여 차관에 대해서는 상환 기한을 연장해 주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61년 9월 11일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4차대회 보고에서 “노동당의 현명한 영도로 5년 동안 진행하여야 할 5개년 계획을 단 1년 반만에 끝났고 1960년을 완충기로 정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1960년을 완충기로 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인민 경제의 옳은 균형을 보장하며 높은 발전속도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적절하고 현명한 조치였다”며 “1960년에 인민경제가 빨리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부 부문에 생긴 긴장성을 풀고 개별적으로 뒤떨어진 부문들을 추켜세우며 인민들의 물질문화생활수준을 더욱 높여 모든 부문에서 5개년 계획의 과제를 완수 또는 넘쳐완수하고 그 성과를 더욱 튼튼히 하였으며 새로운 전망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튼튼한 준비를 갖추어놓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다른 나라들의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 완충기를 정한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북한주재 웽그리아(헝가리)대사관이 작성한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 북한 노동자들이 지난 3년간 너무 지쳐서 당지도부가 1960년을 완충기로 정했다고 고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북한담당 관련 자료에는 ‘1956년 이후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국제경제협력문제에서 상호 조정에 기초하여 통일적인 장기계획 작성을 위한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의 주장처럼 노동자들이 지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시작된 ‘수정주의’가 북한에서 1956년 8월 종파청산으로 이어지면서 숙청과정에 정신적인 피로감으로 지친 당사자는 김일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건설노선에서 소련정부와 마찬가지로 중공업보다 경공업 우선정책을 주장하였고 개인영웅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과 대립되고 있던 반대파들인 연안파의 최창익, 김두봉, 소련파인 박창옥, 박영민 등 많은 간부들을 숙청하였습니다.

소련정부는 북한에서 김일성이 자행한 숙청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였고 이것이 북한의 경제발전을 위한 원조요청에 걸림돌이 되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지난 3개년 계획기간의 원조형식의 지원 대신에 차관형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차관이라도 제공된 덕분에 전후 복구건설 3개년 계획과 마찬가지로 경제발전을 위한 일들이 추진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조의 대폭적인 감소로 인해 1957년 이후 북한 경제성장률은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1957년 26.1%, 1958년 22.2%, 1959년 12.2%로 하락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59년 2월에 진행된 소련공산당 제21차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고 소련공산당 총서기인 흐루시초프와 장시간 면담을 하였습니다. 그는 북한당국이 내세운 1차 5개년 계획이 너무도 무리한 계획이라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요청으로 1959년 9월에 평양을 방문할 것임을 약속하였지만 미국과의 ‘평화공존론’을 공개적으로 내세웠던 흐루시초프는 북한대신 미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전후복구건설시기인 3개년 계획기간과 마찬가지로 5개년 계획기간에도 북한에 대한 소련의 경제적인 지원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56년 8월에 두 나라 사이에 합의된 추가 무상원조 3억 루블은 제1차 5개년 인민경제 복구발전 계획 기간 동안 매년 거의 비슷한 비율로 제공되었습니다. 소련정부는 1957년에는 약 7,990만 루블, 1958년에는 6,530만 루블, 1959년에는 6,530만 루블, 1960년에는 6,440만 루블, 1961년에는 2,690만 루블을 제공하였습니다.

소련의 원조에 의해 청진제철소는 압연 철판의 1/3과 철강 1/5 을 생산했습니다. 김책 제철소는 57%의 선철을, 남포 제련종합기업소는 100%의 전해질 동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흥남 비료연합기업소는 무기비료 생산의 70%를 담당했고 김책제철소에서는 선철가공 및 콕스(코크스)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련의 기술 원조도 큰 몫을 담당하였습니다. 소련의 원조로 1959년 북한의 전력 40%, 주철 51%, 강철 22%, 압연제품 32%, 구리 100%, 아연 80%, 시멘트 19%, 섬유 67%, 합판 100%, 통조림 고기와 생선 100%, 대형 철근 콘크리트 블록 45% 생산되었습니다. 이렇듯 북한의 경제발전은 소련의 원조와 차관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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