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은 왜 김혁의 아들 김환을 감추었나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4.03.13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한은 왜 김혁의 아들 김환을 감추었나 시인 김혁 흉상
/DPRK TODAY 영상 캡쳐

북녘 동포 여러분, 북한 주민이라면 그 누구나 잘 아는 김혁은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도 한 개의 절에 해당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김일성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김혁에 대한 내용은 김일성의 위대성만을 부각하다 보니 사실과 다른 내용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그의 아들 김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2 4새로운 진로를 탐색하던 나날에’, 6혁명 시인 김혁에서 김일성은자본가의 밑천은 돈이지만 혁명가의 밑천은 사람이라며혁명 시인이라고 부르는 김혁도 바로 그런 동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혁명가요조선의 별 1927년에 김일성을 처음 만난 김혁이 그 다음해인 1928 10월에 작사,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노래를 주제로 혁명 영화조선의 별을 창작하여 모든 주민들에게, 지어 소학교 학생들에게마저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쓰게 할 정도로 우상화 선전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김혁은 늘 자기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은 좋은 동지들을 찾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김일성을 만나조선의 별을 지어서 혁명 조직들에 보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조선의 별이 보급되면서 동지들이 자기에 대해 한별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며 그래서 증손이라는 유년 시절에 이름에 더해김성주’, ‘한별’,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길림 등 만주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빨치산 출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조선의 별이라는 노래가 불린 적도 없으며한별이라는 이름은 조선공산당 화요파의 간부였던 김인묵의 별명이었고김일성이라는 이름도 1920년대 중반에 만주 지역에 유명하였던 전설적인 인물인 본명 김광서의 별명(변명)을 도용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1887년생으로 신흥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항일투사 김광서는 1925년경 1천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인물로 김경천 또는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후 본명 김성주인 김일성이 그의 이름을 도용한 것입니다.

 

또 김일성이 1970년대 이전까지도 노래조선의 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에 북한 도서들에서 찾아볼 수 없었지만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중앙당에서 선전선동부 사업을 시작했던 김정일이 만들어낸 노래라는 것도 비밀이 아닙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김일성의 초기혁명 활동 시기 노래를 발굴하려 했지만 찾을 수 없어 1930년대 카륜 지방에서 살았다는 노인을 만나보았으나 당시 평남 개천에서 살고 있던 그 노인은 김일성을 흠모하는 노래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평안남도 안주시와 개천시의 사이에 있는 김씨 일가를 위한 특수목장인 운곡목장에는 초대소처럼 잘 꾸려진 작가들을 위한 별장이 있는데 이곳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 선전용 도서 출간을 위해 작가들이 모여들어 선전자료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작사가들과 작곡가들이 가짜 역사제작소인 이곳에서 며칠 동안 고뇌를 짜내어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1970년대 이전에는 북한에서도 소개한 적이 없는 노래조선의 별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진 노래조선의 별을 작사, 작곡한 인물로 결국 본명이 김근혁이었던 김혁의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역사학자들과 북한 전문가들은 노래조선의 별덕분에 차광수의 이름에 가려있던 김혁이 더 유명해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북한의 구호모두다 80년대의 김혁, 차광수가 되자에서 알 수 있듯이 김혁의 이름이 차광수보다 더 앞에 놓여진 사실만으로도 김혁의 명성은 노래조선의 별이 김정일에 의해 만들어진 이후에 더 유명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처음 김혁을 차광수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차광수는 김혁보다 김일성과 먼저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것은 증언자들에 의해서도 밝혀졌지만 차광수가 김혁보다 5살 어린 김일성에게 형님 벌인 김혁을 돕도록 했다는 사실은 숨기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자신보다 5살 위인 1907 10 11일생인 김혁을 항상 김혁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당시 일본 유학도 갔었고 작가로서 문학적 소양도 높았던 김혁이 16살밖에 안 되던 소년 김성주를 노래조선의 별처럼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북한 주민들이 다 잘 아는 김혁이건만 그의 아들 김환에 대해서는 회고록에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으며 북한 주민들도 모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김혁에게 1929년에 양강도 김형직군에서 출생한 아들 김환이 있다는 사실은 아마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모르실 거라 봅니다. 1927년 김일성을 처음 만나고 2년 후에 김혁은 아들 김환을 보게 되었는데 혁명 영화조선의 별에서도 김혁의 애인이 등장하여 여러분들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십분 이해할 것입니다.

 

김혁의 아들 김환은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김일성종합대학 화학 학부에 입학하였으며 6.25남침전쟁 시기에 동독에 유학가서 화학공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항일 투사 자녀들과는 달리, 그리고 1970년대 이전에 노래조선의 별이 김정일에 의해 창작되기 이전 시기에는 김혁의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탓에 유학을 마친 김환은 귀국 후 내각 중공업성 화학공업 연구소 연구사로 배치되었고 1963년 함흥공업대학 분석화학 강좌 교수로 소환되었습니다.

 

김정일이 한창 당의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제시하고 김일성의 우상화 선전용 노래조선의 별을 만들어 내던 시기인 1970년대가 되어서야 김환은 내각 화학공업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에는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김환은 1977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78 9월 정치위원회 위원, 1980 10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1982 2 7기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장, 1982 4월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았고 1986 10월에 모잠비크에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1988 2 12일에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 겸 화학 및 경공업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혁의 아들 김환은 1988 11월에는 동독을 방문했고 1989 9월에는 소련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1991 12, 화학공업 부장직에서 해임되었는데 당시 중앙당 간부들 속에서는 그가 동독과 소련을 방문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모순점을 발견하고 북한이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이유는 폐쇄적인 경제정책에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김환은 그래도 김혁의 아들이었기에 정치범관리소에는 가지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한때는 부총리까지 했던 김환이 북한의 언론매체들에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김일성과 오진우, 이승기 장의위원으로 노동신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습니다.

 

회고록에 한 개의 절을 차지할 정도로 소개된 김혁이지만 그의 아들 김환에 대해서는 북한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북한 주민들이 잘 살자면 동유럽국가들처럼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친 탓에 숨겨버린 것이고 그래서 김일성의 회고록은 가짜 역사도서, 김씨 왕조의 우상화를 위한 선전 도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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