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1930년대 고난의 행군
2024.04.24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일제의 토벌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의 활동을 다룬 내용은 역사왜곡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설명할 내용은 7권 계승본, 20장 1절 ‘고난의 행군’의 진실에 대한 얘기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서 한 개의 절에 해당할 정도로 90번이나 언급된 ‘고난의 행군’이란 중국 길림성 몽강현 남패자에서 압록강 연안 국경지대인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의 가장 간고하고 어려웠던 행군을 말합니다. 당시 김일성에게 이 시기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 걸어서도 4~5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100여 일이나 걸린 이유는 강추위와 식량난, 여기에 일본군과 만주군의 끈질긴 추격 때문이었습니다.
식량이 다 떨어져 ‘기아의 행군’이라는 표현으로 회고한 고난의 행군시기, 공산비적으로 불리던 김일성 일행은 목재소들을 습격하여 식량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재소 주인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것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 2로군 7연대장이었던 중국인 손장상은 부하였던 4중대장 오중흡에게 근처 목재소를 습격하여 식량을 구입하라고 지시했지만 쌀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오중흡 중대원들은 목재를 나르던 소 20여 마리를 끌고 왔습니다.
김일성도 대원들이 굶어서 쓰러지자 소를 잡아먹는 것을 보면서도 묵인하였고 대원들은 먹고 남은 소고기를 생것으로 배낭에 넣어 두었다가 꺼내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입대했던 신입대원 가운데 만강 지방이 고향인 대원이 여럿 있었는데, 그들은 쌀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감자 몇 자루를 파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부대원들은 이것을 구워먹다가 연기 때문에 토벌대의 추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부대원이었던 조선족 출신 김명주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몽강현에서 화전 쪽으로 빠져나올 때는 우리 뒤를 쫓는 토벌대에 조선말하는 자들이 꽤 많았다. 화전에서 휘남, 장백 쪽으로 빠질 때는 대부분 만주군이었는데 진드기처럼 붙어서 추격하는 토벌대와 눈길로 길 아닌 길을 헤매다나니 남패자에서 12월에 떠난 것이 이듬해 1939년 정초에야 임강현 경내의 산악지대를 경유하여 장백현 13도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이후에 했던 회의에 대해 회고록에서는 북대정자회의라고 말합니다. 회고록에는 “1939년 봄에 북대정자회의에서 남패자회의의 방침을 다시금 확인하고 국내로 진출할 것을 결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기와 더불어’에도 북대정자회의에 대해 김일성 자신이 “1939년 4월 3일에 적극적인 반격전으로 일제 침략자들을 연속 타격하고 조국으로 진군하자는 연설을 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회의에 참가했던 생존자, 중국인 무량본은 “김일성이 1, 2차에 걸친 혜산사건으로 많은 부하들과 장백 지방의 조국광복회 조직이 파괴된 데 대한 보복으로 혜산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방면군 부지휘였던 김재범과 참모장 임수산, 8연대 정치위원 박덕산까지 모두 나서서 반대했다”고 말했습니다. 참모장이었던 임수산은 “혜산 대신 무산을 공격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고 합니다.
1939년 김일성의 혁명활동에 있어서 북한 정권이 가장 강조하는 ‘무산지구전투’는 결국 김일성의 혜산방향 진격에 반대해 무산지구 방향을 주장하였던, 임수산 등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에 진행된 무산지구전투가 결국 김일성이 직접 지휘한 전투로 역사왜곡된 사실은 지금은 비밀이 아닙니다.
일본군 토벌대는 한줌의 쌀이라도 동북항일연군에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딴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살도록 했고 모조리 불사르고 죽이고 빼앗는 소위 ‘3광정책(三光政策)’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이것을 ‘신멸작전(燼滅作戦)’이라고 불렀습니다.
1938년 11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 10여 일간에 걸쳐 진행된 남패자회의는 중국 길림성 몽강현 남패자에서, 중국공산당 소속의 동북항일연군이 날로 심해지는 일본군의 대토벌에 맞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중국 군지도부 성원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었던 모임이었으나, 북한에서는 이것마저 김일성이 회의를 소집하고 연설을 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31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부대에서 활약하였던 27살의 김일성은 이 회의를 주최하기는커녕 참석하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남패자회의에서는 조선혁명가들이 조선혁명의 주인으로서 자주적 입장을 확고히 견지할 데 대해서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광활한 지역에서 군사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며 대중정치사업을 힘있게 벌릴데 대한 과업들이 제시되었다”고 했지만 이것 역시 당시 목격자들에 의해 거짓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북한의 언론매체들과 혁명역사 참고서적들에는 ‘진드기전술’에 의한 적들의 검질긴 추격, 비행기까지 동원한 이중삼중의 포위망, 조선인민혁명군의 내부 와해를 노리고 감행된 대대적인 귀순공작, 무릎을 치는 눈무지들과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참기 어려운 식량난 등 고난의 행군의 어렵던 나날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930년대 말의 어렵던 이 행군에 대해 1970년대 이전까지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1990년대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은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를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1996년, 1997년, 1998년에 고향에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 버려지듯 누워있던 모습이 선히 떠오릅니다. 그때 김정일이 국고를 마구 털어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도록 했는데, 이때 북한의 예비물자들을 비롯한 최악의 경우에 사용될 식량과 필수품들이 시장에서 암거래로 판매되었습니다.
이 때 이 사건도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며 주민들을 달래면서도 매일 매끼마다 일본이 요리사를 채용해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살을 찌우던 김일성의 일가,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에 이르러서까지 비만사랑의 삶은 그들만의 특허권인양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