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이승복 어린이 피살사건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2.06.22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이승복 어린이 피살사건 2018년 10월 18일 평창군 용평면 이승복기념관에서 열린 제50주기 이승복 군 추모식 모습.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김일성의 지시로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특수부대인 124부대 120명이 1968년 말에 동해안으로 남파하여 대한민국의 무고한 주민들을 마구 살해하다가 결국 113명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되었던 울진삼척무장공비사건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120명 특수군 무장공비 중 5명이 1968 12 9일 오후 7시경에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한 농가를 들이닥쳐 9살 난 이승복 어린이와 그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복 어린이 피살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인 이승복 어린이는 1959 12 9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현 용평면) 노동리에서 3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67 3월에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에 입학한 이승복 어린이는 2학년 재학 중이던 1968 12 9, 북한에서 남파된 특수부대 무장공비들에 의해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처참하게 살해됐습니다.

 

1968 10 30일과 11 1, 11 2,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동해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 무장공비들은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살해하다가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들이 소탕 작전에 돌입하자 사살자가 늘면서 일부는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5명의 무장공비는 1968 12 9일 밤,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의 이승복 어린이가 사는 초가집에 침입했습니다. 그 시각, 이승복의 가족들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 했는데 느닷없이 무장공비가 쳐들어 온 것입니다.

 

무장공비들은 다짜고짜로 이승복의 어머니 주대하 여성의 이마에 기관단총을 들이대며 저녁밥을 지어달라고 협박했고 어머니가 쌀이 없다고 하자강냉이나 삶으라고 호령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2명의 무장공비의 감시를 받으며 강냉이를 삶았고 이승복 어린이 남매는 무장공비 3명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무장공비들의 만행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독가촌이라고 불리는 대피소를 지어서 주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이승복 어린이의 가족도 사건이 있은 그 다음 날에 이사할 차례였습니다.

 

무장공비들은 어머니가 삶아 준 옥수수를 먹고 나서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고는 "남조선이 좋으냐, 북조선이 좋으냐"고 물어보았고 북한 체제선전을 하자 9살 이승복 어린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무장공비 한 명이 이승복 어린이를 밖으로 끌고 나갔고 뒤이어 온 가족을 끌고 나가 먼저 어머니의 머리를 벽돌만 한 돌로 쳐서 그 자리에서 사살했고 뒤이어 이승복 어린이에게는입버릇을 고쳐 주겠다며 양 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찢은 다음, 돌로 머리를 쳐서 살해하였습니다.

 

남동생 이승수와 여동생 이승자도 마구 돌로 쳐서 살해한 무장공비들은 퇴비 더미에 이들을 묻었습니다. 무장공비들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당시 함께 살해돼 퇴비 더미에 버려졌던 이승복의 형, 이학관 씨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발견 당시 이승복 어린이의 시신은 오른쪽 입술 끝부터 귀밑까지 찢어져 있었고 뺨 중간과 귀 근처에 십자 형태의 깊은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이승복 어린이와 어머니, 두 동생을 포함한 일가족 4명의 시신은 칼에 맞은 상처가 36곳이나 발견됐다고 합니다. 가족 중 이학관 씨 외에도 이웃집 이사를 돕다가 늦게 귀가해 공비들에게 다리에 칼을 찔린 채 도망한 아버지 이석우 씨와 할머니 강순길 씨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가족들도 목숨만 건졌을 뿐 가족의 학살을 목격한 충격으로 정신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내와 세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이 사건 이후 술에 의지하면서 살아야 했고 형 이학관 씨도 사건 후 불면증에 시달려 10년간 약물치료를 받으며 고등학교도 21살이 돼서야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이 알려지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김일성과 북한군의 동족에 대한 살인적인 야만 행위에 치를 떨었고 이승복 어린이는 반공의 상징이 됐습니다.

 

현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국립공원 남서쪽 기슭에는 이승복기념관이 설립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의 만행을 일깨워주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학교들에 세워져 학생들에게 살인적인 북한의 만행을 고발하는 상징으로 되고 있으며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이승복기념관은 197510,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 정산에 이승복 반공관으로 건립됐다가 1982년 이승복어린이의 모교였던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 근처로 이전하면서 '이승복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을 증언해주는 역사적 공간이 됐습니다.  

 

1982 3 22, 전두환 대통령은 이승복 어린이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고 한동안 대한민국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학(답사)여행 노정에 이승복기념관 관람은 반드시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또 이승복 어린이의 억울한 죽음은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김병욱 작가가 작사하고 정세문 음악가가 작곡한 노래 <공산당은 싫어요>라는 곡인데 잠깐 이 노래의 노랫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원수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개

새 무덤 오솔길을 산새가 운다

 

2

어린 넋 잠든 곳에 겨레가 운다

엎드려 절한 마음 눈물이 솟네

바람도 길 멈추고 어루만지니

하늘이 성이 났다 오랑캐들아

 

1987년에는 이승복 어린이의 비참한 최후를 담은 영화잊을 수 없는 순간이 제작되어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강원도 두메산골,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에 재학 중인 이승복 어린이가 어릴 적부터 군인대장을 꿈꾸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국민 모두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사건이 일어났던 1960년대 한국의 가정들은 넉넉한 생활을 향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승복 어린이의 가족도 넉넉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단란하고 의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공비들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인다는 소식을 듣고 어린 이승복도 자연스럽게 공산당이 나쁘다고 생각했고 결국 집에 북한 특수부대 출신 무장공비들이 들이닥치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것입니다.

 

남파됐던 120명의 무장공비 중 생포된 7명 중 한 사람인 김익풍 씨는 해마다 열리는 이승복 어린이 추모 행사에 참여해 용서를 빌기도 했습니다. 김익풍 씨는 1968 12 15일 밤 11 30분 경 60대 노인인 권영억 씨의 집에 무장을 하고 들이닥쳤습니다.

 

그는 가족을 협박하면서 웃방에 몰아넣고 방을 뒤져서 콩 1되를 꺼내 닦아 먹었고배가 고프면 밥을 지어주겠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있는 동안에 며느리 최원화 씨(당시 26)가 뒷문으로 빠져나가 신고하여 결국 생포되었습니다.

 

이승복 어린이의 묘소 앞에서 김익풍 씨는내가 아니었어도 동료들이 죽인 아이 앞에서 착잡했다미안합니다라는 말로 유족들에게 자기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렇듯 김 씨의 3대 세습은 한겨레의 아픔보다도 저들만의 향락을 위한 것이며 남조선 해방이라고 외치지만 이런 살인 행위를 감행한 것은 오직 한반도를 저들의 독재 아래 두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주원,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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