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청산연구원의 연구계획

김주원∙ 탈북자
201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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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내에 있는 국가과학원 세포 및 유전자공학분원에서 과학자들이 줄기세포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평양시내에 있는 국가과학원 세포 및 유전자공학분원에서 과학자들이 줄기세포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지난 시간들을 통해 저는 북한에서 근무하던 만청산연구원의 실태와 연구내용들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김 부자의 건강장수를 위한 만수무강연구소 산하로 조직된 전문 연구기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만청산연구원에서 활동할 때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 연구계획을 작성했고 그 계획에 기초해 필요한 설비와 자재, 시약들을 어떻게 공급하였는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사회주의계획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에서 모든 경제계획은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작성합니다. 만수무강연구소도 당연히 계획경제의 틀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지만 비밀을 유지해야 된다는 이유로 금수산의사당경리부에서 직접 관할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은 해마다 7월이면 각 연구실들이 자체적으로 계획을 작성했는데 이렇게 작성된 계획은 8월에 종합돼 금수산의사당경리부 계획과에 제출됐습니다. 삼복더위가 한창인 7~8월이면 연구계획을 작성하느라 늘 분주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중대방송’으로 김일성의 사망보도를 듣던 1994년 7월 9일도 연구계획을 작성하느라 한창 바쁘던 시기였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한 시각은 7월 8일 새벽이었지만 부검을 하고 34시간이 지난 뒤인 7월 9일 12시에 ‘중대방송’으로 보도됐습니다.

1994년 7월 9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도 북한의 다른 사무기관들처럼 토요일이면 생활총화와 학습을 비롯한 ‘정규생활의 날’이었습니다. 김 부자의 활동을 다룬 ‘영화문헌학습’이 없는 날 오후면 연구실마다 대청소를 진행했습니다.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서둘러 청소를 마치고 나면 자유시간이 차례지는데 이때면 마당에 있는 정구장이나 배구장 실내 탁구장에서 운동으로 서로의 친목을 다지거나 밀린 연구 과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하루일과였습니다.

토요일 강연회 시간이면 만청산연구원 당 비서였던 신영민이 ‘수령님과 장군님의 노화는 주야를 모르고, 휴식일에도 계속되니 우리가 더 분발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그 강요에 떠밀려 일요일과 휴가마저 무보수로 바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김일성의 사망 보도가 방송되던 1994년 7월 9일에도 오전은 정규생활에 참가했습니다. 다음해인 1995년 연구계획을 7월 3번째 토요일까지 바치라고 했는데 다행이도 이날은 12시에 중대방송이 있다고 하여 자료작업을 위해 외출신청을 했습니다.

이날은 인민대학습당 3층에 있는 열람실에서 미국의 시그마회사와 독일의 만하임회사의 카탈로그를 열람하고 필요한 시약의 주문번호와 가격을 조사해야 했기에 점심도 인민대학습당 식당에서 먹을 것을 계획하고 떠났습니다.

인민대학습당 식당은 규모가 대단히 컸는데 200g 량권 한장에 북한 돈 1원을 내면 빵과 우유 1컵을 주었습니다. 당위원회서는 12시에 중대방송이 있으니 외출하는 사람들은 해당 장소에서 텔레비전이나 방송으로 시청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의 연구소는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에 있었는데 도로를 건너면 서창동 외화상점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여기서 버스를 타고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내려 러시아대사관을 지나면 인민대학습당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보통문을 지났는데 실내 3방송에서 12시를 알리는 신호와 함께 중대방송이 시작됐습니다. 그땐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김일성의 만수무강 연구계획을 세우려 이동하는 사이에 그가 죽었다는 방송을 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나저나 1994년 7월은 김일성의 건강장수를 위한 만수무강연구소의 계획을 짜느라 수많은 과학자들이 뛰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만청산연구원 당위원회의 지시로 개별적인 전망계획과 함께 실장과 새로운 연구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생일 80돌을 맞으며 실장과 저는 ‘줄기세포조직배양을 통한 건강기능성 제품의 효과성검토’를 계획하고 1993년과 1994년까지 2년 동안 기초실험을 진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단계별 계획에 따라 연간 연구계획은 1년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해마다 8월 말까지 다음해의 연구계획을 제출해야 상급기관인 금수산의사당경리부 계획과와 무역과에서 종합적인 계획서를 작성하여 연말까지 해당 설비와 연구재료, 실험시약 등을 정상적으로 수입하거나 조달할 공급체계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연구계획을 세운 ‘줄기세포조직배양을 통한 건강기능성 제품의 효과성검토’ 방법은 평양산원 해산과에서 출산되는 어린이의 태반에서 살아있는 혈관세포들을 분리해 조직배양으로 면역력을 높여주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외국에 주재하고 있는 대사관이나 다른 나라정부에서 보내온 건강장수 식재료나 약초, 건강식품의 효과성 검토는 실험동물인 마우스(흰생쥐)와 랏떼(흰쥐), 모르모트, 토끼, 원숭이 등을 이용하였습니다. 동물실험을 통과한 제품이나 약재는 김일성고급당학교 특설반 간부들을 대상으로 인체임상실험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나이가 80고령을 넘으면서 선진과학기술을 만수무강연구에 빨리 받아들일 데 대한 김정일의 방침이 하달되었고 개별적인 연구사들의 연구방법도 예전에 비해 훨씬 수준이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사람의 살아있는 세포를 배양해 시험관을 통한 실험(in vitro)을 연구계획으로 설정하였습니다. 태아의 태반은 해산할 때 살아있는 세포여서 북한에서는 보건성 보건2국의 승인절차를 거쳐야만 연구재료로 인수할 수 있었습니다.

건당 승인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이 있었지만 평양산원 해산과를 통해 금방 분리한 제대혈관을 언제든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운반도중 혈관조직의 생존유지를 위하여 보온 멸균함을 사용하였고 실마다 배치된 일본산 승용차를 이용하였습니다.

연구실에는 이 실험을 진행할 수 있는 무균조작대와 정온기, 항온수욕조, 진공펌프, 음압식세포분리기, 원심분리기, 입체현미경 등 설비들을 이미 1993년에 일본과 독일 등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혈관에서 내피세포를 분리하는 효소인 콜라겐아제와 M-199 배양액은 미국의 시그마회사와 독일의 만하임회사의 것을 수입하여 사용했습니다. 7월 초면 먼저 실장과 연구사가 다음해의 연구계획을 개별적으로 토의했습니다.

연구계획의 가치가 확정되면 연구실에서 계획심의회의를 열게 됩니다. 계획심의회의를 거치면 7월 말까지 완성된 계획안을 연구원에 제출해야 했습니다. 수천억의 자금이 드는 연구여서 계획안은 매우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작성되어야 합니다.

실례로 연구주제가 ‘불로초의 장수물질 분리정제 및 건강장수 효과’라고 한다면 실험회수와 기간이 명시되어야 하고 매 회수별 불로초의 수량과 실험에 필요한 수십 가지의 시약까지 실험방법에 따른 필요 소요량을 산출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동물실험과 인체실험인 경우에도 실험동물의 마리수와 사료량, 혈관내피세포배양에 관련된 실험일 경우에는 평양산원에서 인수할 살아있는 배꼽혈관의 수량과 실험기간에 따른 인수예상일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했습니다.

연구 가치만 인정되면 거기에 드는 돈은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연구라면 대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금이 많이 드는 연구일수록 연구사들이 받는 압박은 가중됐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의 시대가 열리면서 수백만의 인민들이 굶어서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저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런 시각에도 김정일은 천문학적 자금을 들여 ‘금수산기념궁전’을 지었고 자신을 위한 만수무강 연구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참된 과학자의 길이 어떤 것인지 저는 지금도 만청산연구소에서 보낸 나날들을 돌이켜 보며 수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북한과 같은 곳에서 과학을 전공한 사람은 참된 과학자의 길, 양심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솔직히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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