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조선국민회와 김형직의 진실

0:00 / 0:00

북녘 동포 여러분, 역사를 알아야 민족의 전통을 올바로 계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 기록된 김형직과 조선국민회의 진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1권 2장 제목이 ‘아버지와 조선국민회’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나의 아버지는 지원의 뜻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며 “1917년 3월 23일에 평양 학당골에 있는 이보식의 집에서 장일환, 배민수, 백세빈 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 ‘조선국민회 조직분포도’까지 제시하면서 조선국민회를 지도하였던 김형직이 평양감옥에 투옥되었고 어머니와 함께 면회를 갔던 내용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김형직이 조선국민회 창립을 주도한 인물이 맞을까요?

북한에서 김일성의 전기를 처음 출간한 것은 1952년이었는데 이 도서에도 조선국민회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1958년 출간된 『해방투쟁사』에도 그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1961년의 출간된 『근대혁명운동사』에서 기존의 김형직이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는 내용이 사라지고 그 대신 1916년에 독립운동으로 평양감옥에 투옥됐다는 내용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도 1968년부터 없어지고 그 대신 조선국민회 사건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김형직이 마치 조선국민회 조직자인 것처럼 날조된 경력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본총독부가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된 사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 밝혀진 내용으로 1966년에 일본(日本)에서 출간한 도서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5)」에는 조선국민회의 조직자가 평양사람인 ‘장일환(張日煥)’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아버지를 조선국민회의 조직자로 둔갑시키고 일본이 당시 사건을 제시한 문서를 변조하여 조선혁명박물관에 버젓이 내걸고는 ‘혁명가의 가정’이라는 황당한 우상화 세뇌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선혁명박물관에 걸려있는 일제강점기 자료라고 하는 것도 김형직의 이름이 없던 것을 삽입해놓은 것으로, 원사진이거나 원자료의 복사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일성은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면회했던 일, 출옥하던 날의 정경 등을 눈물겹게 써냈습니다. 80고령의 나이에 이렇게 기억이 생생하게 회고록에 내용을 전개한 그가 왜 1952년 ‘김일성장군 약전’ 등 30~40대에 출간한 전기들에서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68년 이전에 출간된 도서들에서는 대체로 김형직이 3·1 운동으로 투옥되었다고 했다가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고 바꾸었고, ‘조선전사’에는 3.1운동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조선국민회 회원들을 시위에 나서게 함으로써 대중적 시위의 첫 봉화를 올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세기와 더불어’에는 이 주장이 사라지고 그 대신 1919년 7월에 '청수동회의'에서 “민족주의운동을 청산하고 무산혁명의 길로 나설 방침을 선포했다”는 엉뚱한 내용을 주장했고 사상전향에 대한 이야기는 1971년에 출간한 ‘력사사전’에서부터 나오다가 ‘조선전사’에는 1919년 8월의 관전회의로 바뀌었으며 다시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에서는 관전회의에 앞서서 청수동 회의가 열렸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찾아볼 수 있는 인터넷과 역사도서들에는 김형직의 숭실중학교 선배인 장일환이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박용만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886년에 평양에서 태어난 장일환은 27세가 되던 1913년에 안창호 선생 등의 후원으로 평양에 ‘청산학교’를 설립하고 예수교장로회 ‘연화동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14년 자신의 출신학교인 숭실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이끌어 나갈 전진기지인 청년무장 결사단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는 1912년과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하와이에 밀항하여 당시 하와이에서 한국국민회를 이끌면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을 만나 반일무장투쟁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와이에서 귀국한 장일환은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던 혹독한 일본총독정치의 상황을 박용만에게 알리고 청년학생운동의 성과와 경험을 토대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반일독립 비밀결사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김형직보다 8살 이상이었던 반일애국지사 장일환은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청년단지’를 발행하였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후배들에게는 용돈도 척척 꺼내주는 인기 있는 혁명선배였습니다.

이렇듯 자기의 동지들을 하나 둘씩 포섭하는데 성공한 장일환은 1917년에 조선국민회를 창립하게 되었고 그 후배들이 조선국민회 조직원이 되었으며 당시 숭실중학교 후배였던 김형직도 조직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1917년 3월 23일 평양 학당골에 있는 이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창립할 당시 주요 멤버는 강석봉, 서광조, 배민수, 백세빈, 이보식 등 25명이었으며 당시 24살이었던 김형직은 여기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창립당시 주요 멤버였던 반일애국지사인 배민수는 김형직에 비교해보면 더 애국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반일애국투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형직보다 두 살 아래 동생벌인 배민수는 충북 청주에서 의병대장 배창근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배민수의 부친 배창근은 청주감영진위대 육군보병 부교로 복무하던 1907년 8월에 일제가 조선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부하 군인들을 거느리고 의병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싸우다가 서대문감옥에서 사형 당했습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체포와 사형을 목도한 배민수는 반일항전의 의지를 가슴에 새기고 한평생 구국운동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배민수는 1915년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중학생 신분으로 민족운동의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숭실중학교 출신의 청년학생 및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국민회에서 서기 및 통신부장으로 활약했고 이로 인해 배민수는 평양감옥에 투옥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일환, 배민수 등 조선국민회 주요 애국지사들의 투쟁활동과 투옥에 대한 자료는 당시의 자료들과 증언자들에 의해 그 진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조선국민회 설립자인 장일환은 1918년 2월 9일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으로 희생되었지만 김형직은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체포되지도 않았고 3.1만세운동 이후에도 살아남았습니다.

역사를 날조하여 강압적인 현대판 김씨 왕조를 대를 이어 계속하려는 김정은의 야망은 정의와 진리를 외면하고 있기에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김정은은 아무리 인터넷을 폐쇄하여 북한주민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들려고 하여도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는 그들의 진취성은 막을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