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더불어’는 1%의 사실에 99%의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역사도서,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이라는 것은 김일성이 창건했다고 하는 소위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 과정이라고 하는 내용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5장 ‘무장한 인민’은 1931년부터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주장하는 1932년 4월까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9살이던 김일성이 1931년 12월 15일 안도현 명월구에서 무장투쟁을 할 것을 선포하였고 20살 나던 다음 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얼마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기와더불어 5장 3절의 제목은 ‘무장에는 무장으로’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확정한 명월구회의 장소라며 사진을 제시하고 일제가 일으킨 9.18 사변 즉 만주사변을 기회로 새로운 투쟁 기운이 태동하는 시점에 명월구회의를 자신이 조직하고 무장투쟁노선을 내놓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혁명역사 교과서에도 명월구회의를 김일성이 소집하고 지도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증거는 회의 장소에 중국 공산당이 세운 비석의 내용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비석에는 “1931년 12월 15일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서기 동장영은 명월구(옹성라자)에서 중공동만특별위원회 당면열성자회의를 소집하였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석 글에 등장하는 인물, ‘동장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성보다 5살 위인 중국의 반일 애국자 동장영은 1907년 중국 안후이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25년 일본에 유학 갔던 그는 3년 후인 1928년에 귀국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중국 공산당 하남성위 서기, 대련시위 서기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1931년 11월에는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서기를 맡으면서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1932년 봄에는 ‘춘황투쟁’을 지도하면서 동만유격대를 조직해 반일무장투쟁을 지도하던 과정에 1934년 3월 21일, 왕청현 십리평 일대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당시 명월구회의에 참석했던 중국 공산당 당원들과 공청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살 나던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해 동만 일대의 중국인 지주들의 집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하러 중국 공청원들과 몰려다니던 조선인 청년에 불과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의 노농홍군은 9.18사변 후 군중을 조직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며 무장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자고 호소하였다’며 ‘조중공산주의자들 앞에 공동전선을 맺고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지지해야 할 절박한 과제가 제기되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동장영에 대해 ‘특위서기로 임명된 동장영을 자신이 명월구로 오라고 했고 간도 실정에 어두운 그가 밀정에 의해 체포되자 구출작전을 시도해 풀려나게 되었고 명월구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동장영 대신 자신을 회의 소집자로 둔갑하다 못해 중국 공산당의 거물인 동장영을 회의에 참석하러 온 한낱 손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31년 12월 중순, 중국 공산당이 주최한 당 및 공청간부회의도 자신이 소집했다고 왜곡합니다.
김일성은 ‘겨울 명월구회의’라고 불린 이 회의에 차광수, 이광, 채수항, 김일환, 양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등 조선인 청년들이 참석했다고 썼지만 여기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항일빨찌산 참가자들의 회상기’에도 실려서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오중화는 1931년 봄에 체포돼 1932년 12월 석방됐습니다. 오중화가 감옥에 있었던 1931년 12월 열린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은 거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 공산당 문서에는 당시 명월구회의를 소집한 동장영이 중국 공산당에서 만주의 각 지역들에 반일유격대를 건립할 데 대해 내린 지시사항을 전달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동장영은 김일성에게 안도현 일대의 주민 구성이 조선인들이 많으니 적은 인원이라도 좋으니 안도 지역에 반일유격대를 조직하라고 충고했고 김일성은 안도의 구국군 부대들이 공산당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고 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동장영은 김일성에게 공산당 신분을 숨기면 되지 않냐며 어디 갈 때면 혼자 다니지 말고 수완이 좋은 중국인을 데리고 다니라고 충고했고 김일성을 동만특위 안도구위원회 선전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김일성은 그때부터 안도구위원회 서기 안정룡과 조직위원 김일룡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이후 안도구위원회에서는 반일적위대를 조직하였는데 대장은 김철희였고 부대장은 이영배였습니다. 가까스로 대원 10여 명을 모으고 또 총도 몇 자루를 구하였으나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화룡현 위원회에서 군사 간부 1명을 파견하였습니다.
바로 그가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혁명 영화 “조선의 별”에서 나온 박훈입니다.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체격도 건장하고 언행이나 몸가짐도 무인답게 활달하였던 박훈이 나의 군사 고문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안도에서 조직된 반일적위대 대원들이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사격훈련을 하다가 구국군 우사령의 부대에 발각되어 모조리 무장해제당하고 박훈은 반항하다가 총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우사령의 이름은 우명진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안도구위원회의 결정으로 조직위원 김일룡과 함께 우사령을 찾아가 우사령의 구국군 부대에 가입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우사령은 흔쾌히 동의하였으나 부대의 참모장이었던 유본초(劉本初)는 김일성이 공산당원인 것을 알고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안도구위원회에서는 반일적위대가 안도지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사령의 구국군부대와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안도유격대가 구국군 별동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게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북한에서 항일유격대니, 반일유격대니, 안도유격대니, 조선인민혁명군이니 시기에 따라 다르게 부르면서 김일성의 창군에 대해 세뇌 교육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20명에 불과한 중국 공산당 안도구위원회 산하 반일적위대의 구국군 별동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에 안도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직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기록과 증언을 통해 김일성이 20여명 정도의 조선청년들과 양세봉 사령을 찾아가 부대 대원으로 입대시켜 줄 것을 간청했고 그해 7월 31일 모친인 강반석이 사망하자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 산하 부대에서 반일 투쟁을 하던 김일성은 일제의 대토벌이 심해지자 1940년 12월 16명의 동북항일연군 병사들과 함께 소련 국경을 넘었고 해방되기 전까지 5년 동안 소련 하바롭스크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극동군 산하 88보병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했습니다. 해방 이후 1달이 지난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소련군함 푸가초프 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귀국합니다.
역사를 날조하여 강압적인 현대판 김씨 왕조를 대를 이어 계속하려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야망은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