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조선혁명군과 양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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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조선혁명군과 양세봉에 대한 왜곡된 기록에 관해 얘기하겠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5장 ‘무장한 인민’에는 김일성이 1932년 3월부터 안도지구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20여 명의 지휘성원들을 토기점골에 모이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4월 25일,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부대는 조직했지만 합법화할 수 없으므로 모두 뒤골방에 숨어 있는 신세가 되어있었다”고 고백한 점입니다.

‘세기와 더불어’에서 지금 북한 인민군의 시조라고 하는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식이 토기점골 등판에서 거행되었다고 하였는데 김일성이 기억해 낸 당시 인물들은 차광수, 박훈, 김일룡 등 18명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새로 창건되는 부대 규모가 아니라 소대급 게릴라에 불과하다는 거죠.

여기서 또 주목할 점은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창건된 부대의 명칭을 ‘반일인민유격대’라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이 부대의 명칭을 ‘항일유격대’, ‘조선인민혁명군’ 등으로 부르다가 1990년대 이후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반일인민유격대’라고 말했지만, 여전히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항일유격대, 조선혁명군으로 부릅니다.

김일성은 이 회고록에서 유격대를 창건하고 첫 출발을 남만 원정으로 하여 당시 양세봉이 지휘하는 독립군과 공동전선을 맺으려고 했다고 밝혔지만 양세봉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순호라는 연변 조선족 출신 작가가 당시 해당 지역에서 살았던 300여 명의 증인들을 취재해 쓴 ‘김일성 평전’이라는 책에는 김일성이 양세봉 독립군 부대장을 찾아가 손을 잡으려고 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책에는 김일성이 양세봉에게 자신을 받아줄 것을 간청했지만 양세봉은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받으며 중국인 지주들의 집을 털곤 하였던, 비적 같은 존재인 김일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양세봉에게 “왜놈들과 싸우자고 이렇게 총을 들고 왔는데도 그냥 공산당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경계하는 것은 너무 한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양세봉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는 쉽게 용서되지만, 공산당이 저지른 나쁜 짓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화를 냈고 결국 김일성의 양세봉 부대 입성은 좌절됐습니다.

그러면 과연 양세봉은 어떤 인물이며 그의 독립군 부대였던 ‘조선혁명군’은 어떤 무장부대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1896년 6월 5일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난 양세봉은 어릴 적부터 일제의 침략행위를 목격하면서 항일의식을 싹틔웠고 23살 나던 1919년, 만주의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의 흥동학교 교장 이세일과 함께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반일무장투쟁을 시작하였습니다.

27살 나던 1923년에 양세봉은 주요 독립군 중 하나인 참의부 소속의 제3중대 소대장으로 임명됐고, 1924년 5월 16일 평북 초산군 일대에서 일제 경찰과 조우하여 수명의 적을 사살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에는 강계, 위원 지역에서 일제 경찰대와 교전하여 승리하면서 3중대장으로 승급하였습니다.

중국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하던 조선인들이 한인행정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 정의부가 주축이 되면서, 양세봉은 그 산하에 조직된 조선혁명군의 제1중대 중대장이 되었고 또한 일본 침략군과 경찰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서 활약하였습니다. 정의부는 1924년 11월 만주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통합해 조직한 단체입니다.

당시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통일전선이 형성되자, 만주지역에서 조선인 독립군들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중국 화전과 반석 등지에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정의부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양세봉은 정의부 대표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에 참석하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인 ML파와 연계되어 있던 세력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이 조직에서 탈퇴하면서 독립 세력을 규합하려 했던 유일당 조직은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듬해인 1929년 4월에는 정의부를 주축으로 신민부와 참의부가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를 조직하면서 양세봉은 제1중대장 겸 부사령이 되어 일제의 주구기관인 선민부를 토벌하는 것을 임무로 맡았습니다.

1929년 12월 국민부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시키면서, 조선혁명당 산하 독립군부대인 조선혁명군이 조직되었고 양세봉은 여기 부사령에 취임되었습니다. 양세봉은 부사령의 중책을 맡아 일제 기관들과 밀정 처단 등 무장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1931년 9월 18일 9.18사변으로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양세봉 부사령은 “조선인들과 중국인 반일부대들의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두 달 뒤인 11월에 중국인들로 구성된 반일무장부대인 요녕농민자위단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였고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군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32년 1월 친일주구단체인 보민회가 일본 경찰에 독립군의 활동을 밀고 하였고 그로 인해 일본경찰의 습격으로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 등 10여 명이 체포되는 데다, 3월까지 지속된 검거로 만주지구의 9개현에서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간부 83명이 체포되자 위기에 처한 독립군은 양세봉을 총사령으로 선임하였습니다.

이후 양세봉 총사령은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홍경현 왕청문에 옮기고 정의부에서 세운 화흥중학교를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로 개편하여 교장에 양하산, 총대장에 윤일파 등을 임명하고 자신은 명예교장으로, 사관학교를 조선혁명군 관할 하에 귀속시켜 항일역량을 높이는 데 진력하였습니다.

이렇게 조중 반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만주지역에서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던 양세봉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양세봉의 부대에 들어가서 반일무장투쟁에 참가하려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이런 역사적 사실은 ‘조선혁명군’이란 양세봉이 이끈 부대 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반일인민유격대나 조선인민혁명군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양세봉 총사령이 이끌었던 조선혁명군이나 그 이후 조중 반일독립무장부대들이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진행했던 ‘동만인민유격대’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조중 연합전선을 맺은 요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은 일본군과 거의 2백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들을 벌였습니다. 이 전투들에서 연합군은 수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으며 조중 두 나라 민족간 갈등도 해소하면서 공동의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일본군은 1932년 3월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양세봉 독립군과 중국 반일부대를 없애려고 했으나 조중 두 나라 독립무장투쟁부대들의 연합된 전투력에 또다시 참패를 당하고 퇴각하였습니다.

이렇게 반일무장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던 양세봉은 중국인 변절자들에 의해 1934년 음력 8월 12일에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김일성이 아무리 역사를 왜곡해 위대한 반일무장투쟁의 선각자들의 업적을 자신의 것처럼 둔갑시켜도 절대로 역사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북한 당국과 김정은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