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관현악단 (1)

김주원· 탈북자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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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국립교향악단과 윤이상 관현악단이 연주한 음반 '아리랑 환상곡'과 '민요 삼천리' 표지.
북한 국립교향악단과 윤이상 관현악단이 연주한 음반 '아리랑 환상곡'과 '민요 삼천리' 표지.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1980년대는 남북한 체제 경쟁이 극심했던 시기입니다. 동유럽국가들이 점차 정치적 모순과 경제적 난관으로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1980년대 말에는 구소련과 동유럽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되었습니다. 북한 당국도 체제경쟁차원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막아보려고 대한민국 여객기를 폭파하여 115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기도 하였고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면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으로 88올림픽에 대응하려 했습니다. 1980년대 체제경쟁은 예술분야에서도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윤이상관현악단(尹伊桑管絃樂團, Isang Yun Orchestra)입니다.

윤이상 관현악단에 대해 설명하자면 우선 윤이상 선생에 대해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1917년에 어머니의 친정이 있던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3살 때에 가족이 통영으로 이주하면서 경상남도 통영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고향이 통영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취미가 있었던 윤이상 선생은 아버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업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음악공부를 하였고 18살 때에는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음악학원에서 음악이론 등을 배웠습니다. 21살 나던 1939년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가서 작곡에 대해 더 공부하였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윤이상 선생은 부산에서 음악교사로 활동하였고 6.25남침전쟁 이후에는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음악활동을 더 활발히 벌였습니다. 그는 1955년에는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에 유학을 갔었고 1957년에는 서독의 서베를린에서 베를린예술대학 음악학부에 입학하여 음악세계에 대한 높은 지식을 소유하기에 힘썼습니다.

윤이상 선생은 음악작곡가로 점차 명망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는 윤이상 작곡가로 불리었습니다. 그는 1959년에 독일 유학을 마치고 졸업한 직후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여 다름슈타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64년에는 미국 포드재단의 정기적인 재정지원으로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계속 서독에서 음악활동을 벌였습니다. 서독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윤이상 작곡가는 북한의 강서고분 사신도를 보기 위해 그리고 어릴 적 친구인 월북 음악가인 최상한을 만나려고 평양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 '영상' 창작 동기가 강서고분 사신도를 본데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윤이상 작곡가는 1959년 1월에 동독주재 북한대사 박일영과 처음 만나 1963년에 처음 북한을 방문하였고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였습니다. 북한 당국은 당시 서독에 유학 중인 한국 유학생들이나 한인교포들이 서독보다 물가가 저렴한 동독지역으로 나와 식료품이나 서적들을 구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들에게 접촉하여 학자금이나 생활비를 지원하면서 접근을 꾀하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남한보다 북한이 경제수준이 높았던 탓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남한 유학생들이나 서독한인동포들이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대사관에서 식사 초대를 받거나 지원금을 받는 일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관현악 ‘예약’은 1966년에는 다름슈타트 음악제처럼 유명한 현대음악제인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어 관객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하였고 유럽의 신예 현대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1967년 7월에 북한의 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인 일명 ‘동백림 사건’이 터졌습니다. 당시 발표된 이 사건은 서독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 유학하고 귀국한 현직 대학교수들 그리고 당시 현지에서 유학 중이던 대학생 194명을 북한 고용간첩으로 지목한 사건이었습니다. 발표된 명단에는 윤이상 작곡가의 이름이 맨 위에 올랐고 시인 천상병, 화가 이응노 등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윤이상 작곡가가 50살 때 벌어진 ‘동백림 사건’에서 윤이상에게 지목된 죄는 그가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 왕래하였고 비밀리에 북한을 다녀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혐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국적이었던 윤이상 작곡가는 서울로 끌려가 간첩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1967년 12월 열린 1심에서 간첩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 이후 2심과 3심을 거쳐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결 나고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인 동조죄 및 탈출죄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윤이상 작곡가는 투옥 중에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을 완성했고 그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윤이상 구명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윤이상 작곡가의 석방을 위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엘리엇 카터, 오토 클렘페러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이 ‘동백림 사건’ 과정의 불법적인 체포와 국제사회의 여론을 감안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형집행정지를 결정하였고 윤이상 작곡가는 1969년 3월에 석방되었습니다. 윤이상 작곡가는 건강 악화로 서울대학교 종합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작곡을 멈추지 않았고 석방 후 서독으로 돌아간 뒤 가족들과 함께 서독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윤이상 작곡가가 대한민국에서 버림받은 사실을 알고 그에게 더 접근하였습니다.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난 데다가 한국에서 버림받고 서독으로 망명하여 국적마저 서독 국적을 취득한 윤이상 작곡가에게 한국정부를 반대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도록 유도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시 경제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윤이상 선생이 1974년에 설립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도 북한 지원이 없이는 설립이 불 가하였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과 유학생 55명으로 구성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는 당시 남한의 박정희정부를 반대하여 투쟁하는 해외 민주화운동단체로 자기 단체의 사명을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요시찰 대상으로 되어버린 윤이상 작곡가는 한국방문이 거절되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음악 활동은 점차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정치적인 측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동에 대하여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의 사촉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는 1974년에 일본 도쿄에 가서 ‘김대중 구출을 위한 음악회’도 개최하였고 언론들을 통하여 남한정부를 군사독재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북한 당국은 윤이상 작곡가를 북한에 초청해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하도록 해주었습니다. 1979년에 북한을 방문한 윤이상 작곡가는 김일성을 접견하게 되었고 당시 김일성은 그에게 북한음악발전을 위해 일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평양 중구역에 있는 윤이상 음악연구소에는 당시 김일성과 윤이상 부부가 찍은 사진이 큰 벽면에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단에는 김일성이 당시 윤이상 선생에 대해 한 말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윤이상 선생을 아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음악계에서 그런 재간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도 그가 작곡한 교향곡을 들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고 재간둥이입니다”라고 말한 것만 봐도 김일성과 북한 당국의 윤이상 작곡가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순진한 음악예술가, 작곡가로서의 윤이상 선생의 운명은 40대에 북한 당국의 꾀임에 의해 북한을 비법적으로 방문하면서 결국 북한에 발목이 잡히게 되었고 북한 당국의 선전선동의 도구처럼 이용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정부를 비판하는 곡들을 연이어 작곡하였는데 대표적인 곡으로는 1981년에 작곡한 ‘광주여 영원히’, 1986년에 작곡한 ‘나의 땅, 내 민족이여’, 한국청년들의 반정부투쟁을 반영한 ‘무궁동’과 ‘화염에 쌓인 천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북한당국은 윤이상 작곡가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의미에서 북한에 윤이상 음악연구소와 윤이상 음악당을 건설하여 주었으며 호화주택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의 생일 70돌이 되는 1982년부터 해마다 평양에서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윤이상 음악당과 윤이상 음악제, 윤이상 관현악단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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