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자신의 본명에 대해 “나는 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을 무척 귀중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다르게 지어 부르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더구나 나를 별이나 태양에 비기면서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추대하는데 대하여 용납하지 않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김일성이라는 나의 이름이 공식 출판물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31년 봄 내가 고유수에서 군벌들에게 체포되어 20일 가량 감옥생활을 할 때였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김성주를 김일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김성주 보다 7살이나 위였던 중국공산당 당원 이광에 의해서였습니다. 이광은 1928년 왕청현 후하둔에서 지방행정기관 서기로 일하다가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인물입니다. 그는 1931년 11월에 반일구국군 오의성부대에 입대하였고 그 다음해인 1932년 2월에는 구국군내에 별동대를 만들고 대장이 되어 마록구 매복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광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김성주는 이광의 반일해방투쟁 공적을 모두 자신이 한 것처럼 언급했고 이러한 역사왜곡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북한노동당은 인터넷을 차단하여 여전히 북한주민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김성주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려고 무장을 들고 중국인 지주들을 털거나 농촌주민들을 괴롭히면서 자기의 이름대신, 당시 만주지방에서 용맹을 떨치던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도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간도농민폭동으로 불리는 1930년 8.1폭동으로 116명의 조선인이 피살되었고 1200여 명이 검거되면서 공산비적처럼 지주들을 괴롭히던 김성주는 친구인 진한장과 몸을 숨겼습니다. 당시 김성주와 진한장은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으로 비준 받은 상황에서 고유수로 떠난 것이지만 중국 공산당에서 준 임무를 완성하지 않고 숨다보니, 이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것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 특히 공산사상에 매혹되어 있던 조선인들을 동원해 지주들을 처단하는 농민폭동을 일으켰고 이것을 지켜본 진한장의 아버지는 “조선인들이 일본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어떻게 중국 사람들까지 모조리 적으로 만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진한장의 아버지는 조선인 중에서도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연길현 제2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던 이광을 신뢰하였는데, 때마침 이광의 꾀임에 진한장은 집을 떠났습니다. 당시는 조선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 민족주의 반일애국투사들은 역량구축을 위해 사람들을 자기들에게 끌어들여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던 터라, 이광도 김성주도 나이는 어려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험주의 청년이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들의 부하, 끄나풀로 만들기 위해 청년들을 모았다고 할 수 있죠.
이광은 돈화에서 진한장에게 김성주에 대한 얘길 듣고 고유수로 갔지만, 이미 김성주는 고유수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붙잡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통현으로 압송된 김성주는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데 이때 이광이 감옥에 면회를 왔습니다. 경찰들은 김성주에게 “네가 지주들을 습격하여 재산을 털었던, 별명이 김일성(金一星, 찐이싱)이라고 불리는 놈이냐”라고 물으며 조사를 하였는데 이광은 경찰들에게 “이 애는 내 동생인데 별명이 金一星(찐이싱)리 아니고 같은 김일성이지만 한자가 다른 김일성(金日成, 찐뤼청)입니다. 세금을 거둔다며 비적같이 활동한 金一星(찐이싱)은 다른 사람입니다”라며 거짓말로 김성주를 변호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김성주가 조선공산당 화요파 거물간부였던 김인묵의 별명 즉 ‘한별’을 따서 사용했던 김일성의 중국어 발음은 金一星(찐이싱)이었고, 이광이 김성주를 살리기 위해 변호하면서 거짓말로 말한 김일성(金日成)은 중국어 발음이 ‘찐뤼청’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광은 왕청현 하마탕향의 향장이었는데 경찰이 선선히 그 말을 들어준 까닭은, 당시 해당 경찰의 부모도 왕청현 하마탕향에서 살고 있었던 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당시를 회고한 이들의 증언입니다. 어쨌든 이광의 덕분에 김일성은 가까스로 풀려 나올 수 있었고 이때부터 김성주의 별명은 한별에서 김일성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광은 가지고 있던 돈 10원까지도 경찰에게 뇌물로 찔러주었다고 하니 이광의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출소하는 김성주의 손을 잡고 이광은 “성주야, 이제부터 너를 성주라고 불러야 하나, 아니면 김일성이라고 불러야 하나”라고 물었고 김성주는 “아닙니다. 성주로 불러주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 대답에 이광은 “네가 세금 징수하러 다닐 때 한자로 하나의 별을 의미하는 ‘金一星’이라는 별명을 지어 썼다고 하는데, 나는 이 별명이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김성주는 이광이 한별(金一星-찐이싱)이라는 별명을 진심으로 반기는 것을 보고서야 소곤거리며 귀속 말을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님만 알고 있으십시오, 한별이라는 별명은 이미 한별로 불리던 김인묵 선생님의 별명을 본 따서 중국말로 ‘일성(一星, 찐이싱)’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님 때문에 별 성자의 일성(一星)이 이룰 성자를 쓰는 일성(日成, 찐뤼청)으로 바뀔지도 모르겠습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당시에 만주지역에서 유명했던 진짜 김일성 장군은 누구였을까요? 가짜 김일성인 김성주가 역사왜곡을 하면서 둔갑하였던 진짜 김일성은 대한민국에서 반일투쟁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한 함경남도 단천출신 애국군인입니다. 1888년에 태어난 진짜 김일성의 본명은 김창희였습니다.
그의 부친은 온성군수를 지내기도 했던 김두천(金斗天)이었고 모친은 설씨 성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김창희 장군은 김성주가 태어나던 해인 1912년에 단천 일진소학교를 졸업한 후 한성부의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진짜 김일성에 대해 “김창희, 이명 김일성은 일제강점으로 1907년 8월 조선군대가 해산되자 의병대를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수십 차례의 격전을 벌여 큰 성과를 올리는 활동을 하다가 1926년에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일제의 조선강점을 반대하여 반일애국투쟁을 활발히 벌였으며 만주지역에서의 그의 명성은 자자했습니다. 의병대를 조직하고 의병장이 되면서 그는 자신의 본명인 김창희라는 이름을 숨기고 김일성으로 활약하였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는 그의 명성이 자자해지면서 진짜 김일성인 김창희 장군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진짜 김일성인 김창희 장군이 태어난 1888년은 김성주가 태어나기 24년 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명성이 자자하던 진짜 김일성이 전장에서 사망한 1926년은 김성주가 14살 되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김성주가 중국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하느라, 거의 중국말을 쓰던 때여서 조선인들이 쓰는 한글 발음 김일성보다 중국어 발음인 ‘찐뤼청’을 더 많이 쓰게 되면서 누가 그에 대해 말할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해방 후 김성주는 명성이 자자했던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자신을 둔갑시키며 현재의 현대판 김씨왕조를 구축했지만 가짜 역사는 반드시 징벌을 받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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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