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삼촌인 김형권의 반일투쟁에 대해 왜곡시킨 사실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 하면 조선예술영화 ‘누리에 붙는 불’ 화면이 눈에 떠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김형권이 풍산군 파발리주재소를 습격해 ‘오빠시’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악질 일본순사 마츠야마를 권총으로 처단하던 장면과 처단하면서 했던 김형직의 말이 생각납니다. 영화에서 김형권은 “우린 네놈들에게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는 조선혁명군이다. 넌 악독한 침략자로서 조선인민 앞에 지은 죗값으로 응당 죽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서도 김형권이 풍산군 파발리주재소 습격 주모자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1929년 4월에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 소속의 특무제1대장, 최효일이 주도한 사건이었습니다.
김일성 보다 7살 위였던 최효일은 1906년 8월생이었고 김형권은 1905년 11월 생이었습니다. 평안북도 동림군에서 태어난 최효일은 20대 초반이었던 1920년 말에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에 입대하여 무장투쟁을 했습니다.
그는 1929년에 창설된 국민부 산하 특무부대의 제1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한 무장습격활동을 활발히 벌였습니다. 1930년 6월에는 박차석과 정주양 등 대원들을 이끌고 중국 길림성 장백현을 거쳐 국내로 들어가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8월 14일에는 김형권 등 대원 2명을 데리고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내중리, 지금의 양강도 풍산군 파발리 일본 경찰주재소를 지던 중에 일행을 검문하던 순사부장 마츠야마 죠상(松山猪三)을 사살했으며 다른 순사에게는 총상을 입히고 도망쳤습니다.
조선예술영화 ‘누리에 붙는 불’에서는 김형권이 권총을 쏜 것으로 형상하였지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일본경찰기록 등에 따르면 순사부장 오빠시를 총으로 쏴서 처단한 사람은 무장소조 책임자였던 최효일이었던 것입니다.
도망치면서 민가들과 유랑객들에게서 군자금 명목으로 돈을 빼앗기도 하던 일행은 그 다음 달인 1930년 9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체포되어 1년이 지난 1931년 10월 21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최효일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1932년 10월 12일 오후 3시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체포 당시에 이들에게는 만주지역에서 사는 조선인들과 중국인 지주 등 민간인들에게서 독립군 군자금 명목으로 빼앗은 돈 19원이 나왔는데 이것이 증거가 되어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 역시 함흥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무기를 해결하는데서 제일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은 최효일이었다”며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그가 일본말을 잘하여 만주에서 일본인 무기상점에서 일하기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김일성은 1928년인가 1929년에 최효일이 자기를 일부러 만나러 길림으로 온 적이 있다며 규방처녀들처럼 해말쑥하고 곱상하게 생긴 그는 술도 잘 마시고 일본 고위급 군정인물들과 조선 5대 매국노들에게 욕질도 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김일성이 최효일을 만났다는 당시의 연도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1928년인지, 1929년인지 추측한 것이라든가, 당시 7살이나 나이가 많은 최효일이 17살에 불과한 김일성, 그때 이름 김성주를 만나러 일부러 길림에 왔다는 것은 당시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니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내용은 어디가 진짜이고 어디가 가짜인지 북한에서 사는 청취자분들은 알 수 없죠.
대한민국 정부는 10대 나이에 반일무장투쟁에 나서서 독립군에서 무장소조를 책임지고 활동하면서 일본순사들을 처단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26세의 나이에 희생된 최효일 열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에 대해 1930년 8월 풍산군 파발리 일본경찰주재소 습격에 대한 내용만 설명하고 그가 투옥되어 희생하던 시기를 그린 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통해, 최효일이 아닌 김형권의 활동에 중심을 맞추고 있지만 역사자료들에는 더 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1905년 11월 4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에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막내동생으로 태어난 김형권의 유년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30년 8월 파발리주재소 습격사건으로 1930년 9월 4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기사를 통해 이름이 대중에 알려졌습니다.
‘풍산에 출현했던 총기범죄자들, 홍원에서 체포되다’는 제목의 기사에는 “1930년 8월 14일 오후 5시 10분경 함남 풍산 파발리에 나타나 그곳 주재소 순사부장을 사살한 네 명의 권총단이 체포되었다”며 “후치령에서 사라졌던 최씨 등이 홍원에서 잡혔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수사는 북청, 리원, 단천, 홍원 등 6부 경찰 300명이 총동원되었는데 사건 발생 20일이 되던 9월 2일 오후 10시 40분경부터 3일 오전 5시 30분까지 사이에 홍원군에서 체포되었다”면서 당시 체포자들은 4명중에 3명인 최효일, 박차석, 김형권이었다고 기사에 밝혔습니다.
신문기사에서 나열된 이름 순서만 봐도 무장소조 책임자였던 최효일의 이름이 가장 먼저 강조되었고 김형권은 이름이 마지막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주모자인 최효일은 사형에 처해진 데 비해 김형권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것만 봐도 당시 무장소조 책임자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시 만주에서 살았던 300여 명의 조선인 증언자들을 취재하여 출간한 도서 ‘김일성평전’의 저자인 조선족 출신 재미한인작가 유순호도 “직접 일본 경찰관 오빠시를 권총으로 쏜 최효일은 사형에 처해졌고 도망치면서 도중에 몇 군데 들려 독립군 군자금 명목으로 빼앗은 돈 19원으로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은 김형권은 1936년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말았다”고 서술하였습니다.
옥사 당시 김형권의 나이는 31살이었고 그에게는 채씨 성을 가진 아내와 아들 김원주가 있었으나 북한에서는 김원주에 대해서도 김형권의 아들임을 숨긴 채 김일성의 사촌동생이라고만 밝혔습니다. 김형권의 아내인 채 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효일 열사와 마찬가지로 김형권도 북한에 있는 대성산 항일혁명열사릉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도 무장소조 책임자였던 최효일과 함께 김형권도 반일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기에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최효일 열사 대신 김형권을 더 강조하면서 풍산군을 김형권군으로 지역명칭까지 바꾸는 것과 비교가 되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북한에선 이렇듯 당시 사건에 대해 김형권을 무장소조 책임자로 둔갑시켜 김씨일가의 혁명일가로서의 우상화를 강조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절대로 감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가 마음대로 검색하는 인터넷도 차단하고 있는 북한 정권은 반드시 인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일애국자들의 업적마저 자신들이 한 것처럼 꾸며서 영원한 김씨왕조를 대를 이어 계승하려는 김정은, 또 그의 야욕은 역사의 진실 앞에 응징당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