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1945년 12월 서울에서 출간되었던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와 이 책의 저자인 최일천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2023년 5월 23일 북한의 대외선전 인터넷 매체인 '조선의 오늘'에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와 최일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에는 “최일천이 쓴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북한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의 혁명력사를 소개한 도서의 시초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도서”라며 “이런 국보적인 도서가 해방 후 불과 몇 달 사이에 그것도 미제와 반동들이 살판치던 남조선에서 출판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에는 지금의 북한보다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보다 러시아식 공산국가 세우기를 지향하였고 소련공산당과 소련붉은군대의 군정정치를 통해 북한에서 실력자로 등장한 김일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최일천은 북한의 정치지도자로 등장한 김일성을 의식하고 김일성을 미화, 과장한 내용으로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집필하였습니다.
이 책은 한자들이 한글과 함께 쓰인 도서로 김일성에 대한 미화와 왜곡된 자료들을 나열하다보니 오기투성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金聖柱)의 한자는 성스러운 성, 기둥 주인데 그 대신 정성 성(誠), 기둥 주(柱)로 쓰는가 하면 길림육문중학교를 길림제5중학교로 기록하는 등 모두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최일천은 김일성이 동족상잔의 야만적인 6.25남침전쟁을 일으키자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최일천은 1950년 11월 5일 인민군에 납북되어 처형당하였습니다.
그러면 북한에서 처형시키고도 김일성의 우상화선전에 써먹고 있는 최일천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김일성보다 7살 연상인 최일천은 1905년 10월 11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으로 부모들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중국 봉천성 유하현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20대 초반에는 독립군 활동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최일천은 22살 되던 1927년 길림성 회덕현 오가자의 삼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30년 오가자 반제청년동맹에서 활동하였고 잡지 '농우' 주필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31년 12월부터 장춘과 베이징, 심양 등지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였고 해방 후에는 귀국하여 서울에서 '동방문화사' 기자로 일했습니다.
김일성과 최일천 사이를 알자면 오가자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반일애국열사 고이허에 대해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지독한 반공광신자로 평가된 고이허(高而虛)는 1902년 9월 5일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고이허는 1992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1885년 서울 중구 정동에 설립된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만주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계몽활동도 벌였고 농우회를 통해 농민운동도 활발히 벌였습니다.
고이허는 최일천이 교사로 근무하던 삼성학교 교사로 함께 일하면서 차광수와 김성주 등 공산주의 성향의 청년들에 의해 공산화 되어가던 오가자를 민족을 중시하는 반일민족운동의 선봉지역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한 최일천이 독립군 내에서도 이론가로 소문한 수재형의 독립운동가인 고이허를 따르자 차광수과 김혁, 김성주 등 공산당파 청년들은 고이허를 자기들의 편에 돌려세우려고 갖은 모략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고이허를 비롯한 반일민족해방을 주장하는 청년들과 차광수, 김혁, 김성주 등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공산주의 청년들 사이에는 서로 반목질시하고 심지어 증오하는 감정까지 폭발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김성주보다 10살이나 연상인 고이허가 김성주에게 무참하게 욕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산당에서 “독립군 내 청년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차광수는 최일천을 비롯한 청년들에게 접근해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성주가 친형처럼 믿고 따라다니던 차광수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고이허는 김성주에게 “네가 오가자에서 하고 다닌 짓거리들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청총의 ML계 아이들이 몽치단을 만들어가지고 올 여름에는 반석지방을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요즘은 오가자의 반제청년동맹도 그자들 때문에 무척 속을 썩이고 있다. 그자들을 오가자에 끌어들인 것이 바로 차광수와 네가 한 짓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고이허는 27살, 김성주는 10살 어린 17살이었습니다. 고이허의 욕설에 김성주는 얼굴이 새빨갛게 질러 아무 말도 못했다고 그 자리에 있었던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당시를 회고하면서 증언하였고, 이 내용은 조선족 출신의 미국 국적 작가 유순호에 의해 2017년 발표된 도서 '김일성 평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일천 등 반일애국청년들을 공산주의 분자로 만들어 민족주의자들을 마구 테러하러 했던 김성주에게 독립군 반일애국선배였던 고이허와 현익철, 양세봉 등은 “천하에 고약한 놈, 저런 고얀 놈 보게나”라며 혀를 찼고 그때부터 김성주는 고이허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1936년 12월경, 남만주 관전현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에 체포되었던 고이허는 그 다음해인 1937년 2월 심향에서 총살형을 당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애국공로를 인정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오가자에서 자기에게 원칙적이면서도 아픈 욕을 하였던 고이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이허와 삼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최일천을 차광수와 김혁 등과 함께 부단히 공산화시켜 민족주의 성향에서 공산주의 성향의 청년으로 만들었습니다.
해방 후 공산주의 성향을 가진 최일천이 김일성을 민족의 영웅처럼 우상화하는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집필하였으나 그가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면서 북한에서는 최일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지시로 인민군에 의해 암살당했던 최일천은 1960년대 이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고 지금도 그의 반일투쟁 업적은 북한 언론들에 자주 실리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4장 6절 혁명시인 김혁, 9절 이상촌을 혁명촌으로, 10절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등에는 최일천에 대한 김일성의 회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일천에 대해 1989년 4월 3일 노동신문에는 '태양과 일생-위대한 수령님께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인 최일천 선생께 베풀어주신 은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 1993년 4월 20일에는 조국통일상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6.25남침전쟁을 일으킨 민족의 원흉 김일성을 비판한 이유로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최일천이 김씨일가의 우상화선전을 위해 1960년대 말 이후로 반일애국열사가 되어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도 가묘가 세워질 정도로 북한에서 선전선동의 제물로 이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최일천이 이 일을 안다면 현대판 김씨 왕조에 대해 어떻게 욕을 할 것인지는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가 생전에, 구소련의 총칼을 가지고 북한 지도자로 선출된 김일성을 추앙하면서 역사왜곡을 곁들어 썼던 도서가 오늘날 김씨 왕조의 선전선동의 근저가 되고 회고록에 이용된다는 것도 그에겐 참을 수 없는 수치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